노동자역사 한내

노동자역사 한내 를 통해 한 시대 노동운동의 역사를 지켜낸 김종배 동지의 유지를 계승하고

노동운동가 김종배 추모사업회는 를 통해 사라질 뻔했던 한 시대 노동운동의 역사를 지켜낸 김종배 동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노동운동 역사자료실을 만들어 노동운동 자료를 수집 보관해 왔습니다. 2007년 추모사업의 차원을 넘어 노동운동진영 전체의 사업으로 발전시키고자 노동자역사 한내를 설립하고 열사정신계승으로 주요하게는 노동운동역사자료실 운영을 통해 노동자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미래의 건강한 노동자 주체의 양성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다섯 시의 TV 읽기] 누가 교권을 말하는가?양돌규 (노동자역사 한내 운영위원)넷플릭스에서 6월 5일 공개된 시리즈 이 10편으로 막을 내렸다. 한국에서 넷플릭스 시청률 1위뿐만 아니라 비영어권 45개국에서 1위를...
23/06/2026

[다섯 시의 TV 읽기] 누가 교권을 말하는가?

양돌규 (노동자역사 한내 운영위원)

넷플릭스에서 6월 5일 공개된 시리즈 이 10편으로 막을 내렸다. 한국에서 넷플릭스 시청률 1위뿐만 아니라 비영어권 45개국에서 1위를 찍는 기염을 토했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을 둘러싼 이야기는 도리어 무성해졌다. 특히 이번 6.3 지방선거 경기도교육감 당선자 안민석이 라디오에 출연해 교권보호국의 현실판이라 할 수 있는 ‘교육활동 보호국’ 도입의 필요성을 언급한 이후 논쟁은 격화됐다. 안민석 당선자는 “폭력은 절대 안 된다”면서도 교사들 중 특수부대, 해병대, 특전사 등 출신들이 의외로 많으니 이런 교사들 20~30명을 확보해 학교와 교사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에 투입할 수도 있고 이들이 계도와 훈계를 통해 학교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면서 공론화를 통해 구체화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정근식 서울교육감 당선자는 ‘파시즘적 발상’이라며 비판적 의견을 밝혔고, ‘정치하는 엄마들’과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회’ 등도 목소리를 높여 안민석 당선인의 구상은 “학교 문제의 책임을 학생 인권의 확대, 학부모의 개입, 교권 약화로 돌리며 강력한 통제와 징벌에서 해법을 찾는다”고 비판했다.

‘경기도판 교권보호국’이 현실화될 것 같지는 않다. 워낙 비현실적인 구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디어에 민감한 정치인 출신 교육감이 드라마의 흥행에 기대어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잘해봐야 교권 보호와 관련한 전담 부서 정도가 만들어질 수는 있겠지만, 그 역시 뭐 대단한 실효성을 가질 것 같지는 않다.

어쨌거나, 그런 현실의 논란과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시리즈 을 빌어서 ‘참교육’, ‘교권’, ‘학교 현장’, ‘전교조’ 등에 관한 기사, 칼럼, 게시물을 각종 매체, SNS에 쓰고 있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대부분 글에는 공감되는 요소가 담겨 있었다. 교사, 학생, 활동가 등이 길게는 수십여 년, 짧게는 십여 년에 걸쳐 교육 현장에서 벌어졌던 일을 돌아보고 현실을 진단하는 내용이었다. 그 모두가 진실의 일부임은 물론이다.

사적 복수와 범죄 수사물의 혼종

시리즈 은 동명의 웹툰 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드라마 제작을 앞둔 2025년 7월, 전교조 등 62개 교육시민단체가 넷플릭스 한국지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작 중단을 요구했다. 이는 웹툰 이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인종 비하 등의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학생 인권의 신장이 교권 침해 현실로 이어진 것처럼 묘사하며 ‘체벌금지법’ 때문에 교권이 붕괴됐다는 허구적 설정도 비판했다. 이런 비판과 제기 덕택인지 1년여가 지난 후 공개된 드라마는 수정과 보완에 상당한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이고, 논란보다는 보편적 공감을 훨씬 더 많이 끌어냈다.

예컨대 시리즈 에서 교육부 장관은 이렇게 말한다. “교권보호국은 학생들과 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괴물들과 싸우려는 겁니다. 괴물은 괴물로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폭력은 학교 수준을 넘어섰는데 교사들에게 분필이나 들고 싸우라는 겁니까?”
이 대목에서 교권보호국은 마치 학생들과 전면 전쟁을 선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10편까지를 보면 ‘교권보호국’과 대립하는 것은 비단 ‘괴물’이 되어버린 학생들, 가령 학폭 가해자들과 사이버불링을 행하는 학생들만이 아니다. 교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학부모, 시험 문제를 유출하면서 뒤로는 학원을 운영하는 교육감 출마 야망을 품은 교사, 대치동으로 이사와서는 자녀에게 약을 먹여가면서 의대 진학으로 몰아가는 어머니, 각종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면서 피해자들과 학교와 사회를 조롱하는 촉법소년 4인방, 학교 현장에 광범하게 퍼져 가는 온라인 도박 조직, 그리고 궁극의 빌런으로는 학교 담장을 넘어 조직된 마약 네트워크 등이 등장한다.

마약 카르텔의 정점에 있는 조규철(이봉준 분)은 나화진(김무열 분) 감독관의 약혼녀이자 최강석(이성민 분) 교육부 장관의 딸인 교사 최가윤(하영 분)을 살해한 살인범이기도 하다. 조규철이 다시 학교로 돌아오고, 이런 내막을 알게 된 국회의원 황기태(김종수 분)는 ‘교권보호국’이 ‘사적 복수’를 행하는 기관에 불과하다며 폐지를 주장한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 같은 폐지 주장에 별로 동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차피 허구이기도 하지만, 드라마는 예컨대 ‘사적 복수’ 논란보다는 ‘정의의 실현’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교권보호국’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역할이라고 믿기 때문인 것 같다.

“교권국은 선생 편도 학생 편도 아닌 피해자의 편입니다. 학생이 학생 역할을 하지 못해서 선생이 선생 역할을 하지 못해서 피해를 본 그 누군가를 위해 교권국은 존재합니다. 이것이 사적 복수라면 예 맞습니다. 법이 못하는 걸 누군가는 나서서 복수라도 해줘야죠. 그래야 피해자들이 숨 쉬고 살지 않겠습니까.”(4화, 최강석)

그래서 드라마 은 한국의 학교 현장에 대한 작품이라기보다는 범죄수사물이라는 장르물, 그리고 근래 많이 제작되는 ‘사적 복수물’, 예컨대 의 계보와 더 친연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대신 완전한 사적 복수가 아닌, 국가 기관에 의한 정의의 실현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드라마 은 바로 학교를 배경으로 한 경찰놀이, 다시 말해 범죄수사물이라는 것이다. 그 점을 분명히 할 때 장르적 허용이 가능하다. 예컨대 장르로서 범죄수사물은 여러 위기와 긴장의 시간을 거쳐 진범이 잡히고, 피해자를 위로하고, 정의가 실현되면 시원하고 통쾌함을 던져주는데 드라마 은 딱 그런 사이다 같은 응징을 행한다. 교권보호국이 ‘참교육’하는 방식은 “자신이 한 행동을 고스란히 돌려받음으로써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깨닫게 하는 것, 그게 바로 교권국이 추구하는 진짜 교육이다”라는 대사처럼 정확히 ‘거울 치료’의 방식인데, 이는 다분히 극적인 장치일 뿐이고 실제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거울 치료’의 방식으로 정의 실현의 방식을 제한한 것이 웹툰과 드라마의 차이이고 이는 논란을 피해가기 위한 영리한 방도였을지도 모른다.

대부분 시청자는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딱 그 정도의 후련함을 느끼는 것 같다. ‘초법적 권한을 가진 교권보호국’이 현실에서 가능할 거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그런 정부 기관이 정의를 실현해주는 데에 통쾌해하는 것이다. 사적 복수에 대한 열광의 배면에는 이처럼 정의가 국가에 의해서 실현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

두 가지 교권, 누구의 교권인가?

그런데 TV를 끄고 그냥 잊고 지내기에는 마음 한구석에 ‘찝찝함’이 남은 사람들이 있다. 그 ‘찝찝함’이 모두 같은 이유일 수는 없겠으니 내 경우만 한정해서 정리해두도록 한다.

교권은 넓은 의미의 규정도 있지만 좁은 의미에서 법이 인정한 교사의 교육할 권리 및 권한을 의미하고 초중등교육법 등 여러 관련 법령을 통해서 그 권리 및 권한의 내용이 규정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교권이 학생, 학부모 등에 의해 침범당하면서 교육할 권리의 실현, 즉 교육 현장에서 교육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방해받고 특히 학급 붕괴, 교실 붕괴 현실에서 교사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 수년간 강조돼 왔다. 급기야 에서처럼 국가가 교권을 수호하고 학교를 지키는 역할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사를 돌아보면 국가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가능한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1960년 4.19 혁명 후 결성된 교원노조가 5.16 군사쿠데타로 좌절된 후 제도교육은 반공주의와 군사주의를 관철시키는 국가와 온갖 비리로 만연한 사학 족벌체제에 의해 지배돼 왔다. 그 과정에서 교육할 권리, 교사의 권리 따위도 처참하게 짓밟혔다. 이에 저항하는 가냘픈 움직임이나 목소리는 ‘교권 수호’라는 수사를 동원하곤 했는데, 이때 ‘교권’은 바로 ‘국가 폭력과 사학재단의 전횡으로부터의 보호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교권을 짓밟는 한국의 국가 역시도 ‘교권’을 들먹이곤 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1985년 2월, 대통령 전두환은 문교부의 업무 계획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지난해에는 일부 학원에서 방화 기물파손 폭력 수업 방해 등 불법 사례가 없지 않았다”고 말하고 “학교 당국은 면학 분위기를 해치고 선량한 다수 학생에게 피해를 주거나 교권을 유린하는 행위는 절대로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며 관계 당국도 법에 따라 엄중 조처해야 할 것”이라고 지시했다(경향신문, 1985년 2월 9일). 당시는 교육개혁심의위원회 출범, 7.31 교육개혁 조치, 학원자율화 등의 정세가 전개되는 시절이었고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유화국면이 열리는 시점이었다. 대학에는 총학생회가 재조직되고 민주화운동의 한 축으로서 학생운동 세력이 대중적으로 진출하는 시점이었다. 바로 그러한 움직임에 쐐기를 박고자 하는 군사독재 정권이 ‘전가의 보도’처럼 들고나온 것이 바로 ‘교권’이었다.
대통령의 지시가 나왔으니 뒤이어 문교부 장관 차례다. 얼마 뒤 손제석 문교부 장관은 학원의 정치장화를 배격하고, 대학생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불용하겠으며 학내 질서 유지에 관계되는 일체의 불법행위에 대해 ‘교권’은 제때 빠짐없이 개입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학내 기물파손, 폭력, 화염병 투척, 도서관 점거, 학교 시설의 아지트화, 타 학생의 수업 방해 등에 대해서는 사법적 판단과 관계없이 학칙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밝혔고 이후 ‘학원안정법’을 추진하기도 했다. 1980~1990년대 내내 대학에서의 학원자율화 투쟁은 늘 ‘교권’의 벽에 부딪혔고, 군사정권과 사학재단의 편에 빌붙어 일신의 안위만을 구했던 어용 교수들은 재단 비리 분규 때마다 ‘교권 추락’을 개탄하곤 했다.

이처럼 상반된 교권 개념을 들고나와 대립이 이루어진 것은 대학에서만이 아니었다. 친일파의 작품으로 가득찬 국어 과목이나 반공주의, 실증주의 역사 과목 같은 국정교과서를 달달 외워야 하는 살인적인 입시 교육 체제에서 학생들에게 몽둥이질해가면서 통제해야 했던 교사들의 반성적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1985년 지 사건과 1986년 5.10 교육민주화선언이었다. 이는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도 이어져 1988년 민주교육실천 전국교사협의회 출범, 1989년 전국교직원노조 출범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때마다 전두환-노태우 군사정부와 이에 대항하는 교사, 학생, 학부모들이 모두 들고나온 것이 ‘교권’이다. 한국의 국가와 문교 당국은 일부 좌경 세력의 책동으로 교육 현장에서 교육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주장했고, 민주화운동 세력은 반대로 교육 현장의 자율성이 국가의 강압에 침해받고 있다고 보았다.

발명되어야 할 교권과 참교육

당시 정부 입장에 가까웠던 서울대학교의 한 교육학 교수는 ‘아쉬운 교권 존중’이라는 제하의 한 칼럼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교사의 전문적인 역량은 교사의 권위가 인정될 때 가능해진다.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가 인정되고 존중될 때 그의 전문적인 역량은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권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물론 교권이라는 개념 속에는 권위만이 아니다. 가르치는 사람의 권리가 포함된다. / 그러나 교권은 원칙적으로 교육의 권위를 뜻하며, 바로 그 권위는 교육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교사의 권위를 학생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교사의 가르침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교사의 권위는 바로 교사에 대한 존경으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동아일보, 1987년 5월 14일)

그러면서 그는 학부모가 교사에 입에 담지 못할 언동으로 행패를 부리거나, 학생들에게 단체 기합을 좀 줬다고 해서 학부모의 항의 전화가 빗발친다든가 하는 사례를 열거하면서 오늘날 청소년들이 너무 과보호되고 있다고 혀를 찬다. 또 교사의 가르치는 권위가 전혀 인정되고 있지 못하다고 개탄한다. 그러면서 학부모, 나아가 사회 전체가 교권을 존중하는 사회 풍토 조성을 강조하면서 글을 맺고 있다.

이 칼럼은 21세기 드라마 속 ‘붕괴된 교권’ 상황, 그리고 현실 인식과 유사하지 않은가? 안민석 경기도교육감 당선자의 상황 인식과 거리가 없어 보이지 않는가? 오늘날 대체로 교권을 이와 같은 정도로 이해하고 있지 않나?

바로 이 칼럼을 쓴 자가 2년 후에 한국의 유사 이래 최대 ‘교권 말살 사건’이었던 1989년 전교조 교사 1,500여 명 해고 사태의 장본인인 정원식 문교부 장관이다. 그리고 그는 또 2년 후인 1991년 국무총리 서리로서 교사 대량 해직을 고등학교에서 지켜봤던 외국어대 학생들로부터 밀가루와 달걀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이 학생들을 두고 스승에게 폭력을 가한 ‘패륜아’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 낙인을 찍을 때 국가와 문교 당국에게 ‘교권’은 이미 주어져 있는 신성한 어떤 것, 가령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마라”고 말할 때의 그 맥락 속에 있었다.

그러나 교권 유린의 대표적 장면은 역시 1989년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결성되던 날, 처음 결성 장소로 알려졌던 한양대에서 공권력에 의해 굴비 엮듯 끌려 나오던 교사들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 교사들에게 ‘교권’은 ‘신성한 어떤 것’은 아니었다. 1970~1980년대 내내 비참한 교육 현실, 학생들의 죽음, 입시 지옥, 가난한 이웃들의 현실을 외면하거나 침묵한 데 대한 반성을 기반으로 국가로부터의 부당한 간섭을 뿌리치고, 촌지나 받고 사학재단의 비리에 침묵하는 비겁을 넘어서서,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신뢰와 믿음을 얻는 실천 과정에서 획득되어야 할 그 무엇에 가까웠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교권’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자주적으로 구성해야 하는 실천적 과제였고 동적인 운동의 지평 위에서 구체화해야 할 그 무엇이었다. 어떤 것을 가르칠 것인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무엇을 위해 가르칠 것인가? 이 모든 것을 탐구했고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구체화한 것이 민족, 민주, 인간화로 요약되는 전교조의 이념이었다.

전교조는 그런 교사들의 ‘존재론적 결단’, ‘실천적 결단’이 있었기에 광범한 지지와 엄호를 받을 수 있었다. 좌경 용공 교사라며 길길이 날뛰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많은 민중, 시민은 적어도 전교조 교사는 아이들을 차별하거나, 두들겨 패거나, 촌지를 밝히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이런 교사들의 차이를 직접 경험했던 학생들 역시 교사들의 결단에 공명했었기에 연인원 50만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각 학교에서 혹은 각 지역의 연대집회를 통해서 구속, 퇴학, 정학을 불사하고 시위와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전노협을 비롯한 노동자들과 농민들도 마찬가지였다. 1989년 9월 24일에 열린 ‘전교조 탄압 저지와 합법성 쟁취를 위한 국민대회’가 전국 21개 시·도에서 열렸고 이 이후 전교조 사수를 위한 광범한 민중연대가 기반이 되어 몇 년간의 전교조 법외노조 시절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전교조 행사라면 팔을 걷고 나섰던 수많은 노동조합과 단체, 학생들을 기억한다. 적어도 당시 전교조는 교사들만의 노조는 아니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다. 이 글에서 그 시간을 다 담아낼 수는 없겠다. 다만 지금은 전교조가 제1노조도 아니거니와 전교조가 내걸었던 ‘참교육’도 ‘민족, 민주, 인간화교육’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두들겨 패서 가르치거나 혼쭐을 내는 인과응보’ 같은 식으로 변용해서 광범하게 쓰이는 현실이다. ‘참교육’의 변용이 전교조의 효용에 대한 일종의 회의의 결과라면 ‘교권보호국’은 2000년대 이후 신장되고 변화되어 온 학생 인권과 교육 현장의 변화에 대한 거대한 백래시의 기획처럼 보인다.
이런 가운데서 ‘참교육’이라는 어휘를 바르게 써야 한다, 같은 소리를 해봐야 아마도 언중의 용법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참교육’을 고집하든 아니든 전교조의 실천적, 운동적 노선과 이념을 돌아보고 다시금 질문을 던져보는 건 어떨까? 21세기 글로벌하게 학교가 붕괴된 이 시대에 운동적, 실천적으로 새롭게 구성해야 할 ‘교권’이란 무엇인가? 우리 머릿속에 남아 있는 교권도 아직 정원식의 그것 정도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밀가루와 계란 세례를 좀 받아야 하지 않을까. 참교육 좀 당해도 싸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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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26년 넷플릭스 드라마 의 한 장면.

[그때 그사람들] 6.10만세투쟁 결정한 강달영의 아지트나영선(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일제강점기 3대 대중투쟁을 꼽는다면 무엇보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투쟁은 무엇일까? 시기...
09/06/2026

[그때 그사람들] 6.10만세투쟁 결정한 강달영의 아지트

나영선(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일제강점기 3대 대중투쟁을 꼽는다면 무엇보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투쟁은 무엇일까? 시기순으로 말한다면 1926년 6.10만세투쟁과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그것이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수년간 저항해 온 구한말 항일 의병을 피로써 제압하고 무능력하고 무책임했던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 이척, 즉 순종이 제 손으로 한일병합조약에 도장을 찍게 만들면서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 폭압적인 헌병통치로 조선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건설해가고 있었다. 자신감이 붙은 일제는 1915년 경복궁 한복판에서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를 열어 식민지 민중을 포섭하려 했다. 하지만 3.1운동이 전 조선 민중의 독립 의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3.1운동의 방아쇠는 고종의 죽음이었다. 7년 후 국권 피탈을 무력하게 동의한 순종이 1926년 4월 26일 오전 6시 10분에 사망했다. 일제로서는 3.1운동의 재현을 반드시 막아야 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국가폭력기구를 최대한 동원했다. 순종이 사망한 창덕궁 앞 돈화문에 임시경비사령부를 차리고 기마경찰을 배치했으며, 헌병을 돈화문 앞에서 종로까지 배치해 당시 신문에 “경관으로 성벽을 쌓았다”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요주의 활동가 164명을 밀착 감시했고, 조선노농총동맹 간부들을 불러 각종 집회 금지를 통보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주요부를 헌병 10~20명이 짝을 이뤄 순찰하며 위력을 과시했고 밀정과 정사복 경찰을 배치했다. 조선공산당이 제작한 전단이 발각되고 권오설 등 만세 시위의 준비팀 일부가 체포된 6월 7일 이후에는 의장대라는 이름으로 1만이 넘는 군대를 동원했다.
한편으로 일제는 순종의 죽음을 희석하기 위해 경복궁 안쪽에서 6월 11일 끝낼 예정이던 대조선 전람회를 6월 21일까지로 연장했다. 이 박람회는 서커스, 동물원 등 오락 행사를 무료로 개장했다. 이렇듯 일제는 순종의 장례가 제2의 3.1만세운동이 되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의 5월 2일 결정

조선공산당은 전년도인 1925년 12월 신의주사건으로 타격을 입었지만 새로 선출한 지도부를 중심으로 조직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조직 역량을 회복하고 안정화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김재봉과 박헌영 등 검거된 주요 간부들의 헌신적인 진술 투쟁과 조직 보위 덕분이었다. 물론 주요 간부들의 체포로 타격이 작지 않았지만, 전체 당원과 공청원 대비 5% 미만의 조직원만 검거되고 더 확대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새로 선임된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하는 조선공산당은 내부 정비와 조직 확대를 진행했다. 당의 기본단위인 세포단체를 정비해 전국적 규모로 확장하고 있었다. 더구나 1925년 4월 창당 이후 코민테른에 승인을 얻기 위한 노력이 열매를 맺어 1926년 3월 31일에는 코민테른의 정식지부로 승인을 얻어 조직적·물질적·사상적 지원을 받을 수가 있었다. 이는 조선공산당의 지도부에게 큰 힘이 되었다.
원래는 5.1메이데이투쟁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순종의 사망이라는 변수가 생기면서 정세 변화에 따른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해졌다. 바로 6.10만세투쟁이다.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순종이 사망한 지 6일 만인 5월 2일 삼각동 28번지 강달영의 거주지에 모여 대책을 논의, 순종 인산일인 6월 10일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결정은 많은 고민을 동반했다. 그것은 투쟁에 반드시 동반되는 희생의 문제였다. 더구나 불과 6개월 전 당 중앙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구속으로 조직력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기에 자칫하면 당의 명운이 갈릴 수 있는 투쟁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고민을 깨뜨린 이가 바로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를 맡고 있던 권오설이었다. 권오설은 당면투쟁을 결행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당 중앙은 투쟁에 돌입하기로 했다. 다만 예상되는 탄압에 맞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조치로 한시적 투쟁기구인 6.10투쟁지도특별위원회(6.10투쟁특위)를 설치하고 위원장에 권오설, 위원에 박민영, 이지탁을 선임했다. 회의가 열린 강달영의 서울 거주지는 그가 발령받은 ‘ㅁ자’ 모양의 한옥을 사옥으로 쓰던 조선일보(관철동 249번지)와 청계천만 건너면 지척이었다. 집 바로 옆으로는 남산에서 발원한 창동천이 흐르고 있었다. 방음이 잘 안 되는 전통 가옥의 특성상 회의는 큰 소리로 진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강달영 책임비서 시절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가 열린 회의 장소는 신중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비밀결사의 최고위급 간부들의 회의인 만큼 장소에 신경을 써야 했다. 신문조서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이 자주 이용한 회의 장소는 크게 세 곳이었다. 즉 경운동 구연흠의 집, 종로6가에 있는 동아일보 영업국장이자 취제역(오늘날의 이사)을 지낸 양원모 자택의 사랑방, 그리고 바로 강달영이 머무는 삼각동이 주요 회의 장소였다. 세 곳 중 두 곳은 당 중앙간부의 자택임을 알 수 있다. 책임비서 강달영 외에도 구연흠은 당의 중앙검사위원이었다. 양원모는 김철수, 장덕수, 신익희 등과 와세다대학 동기였으며 신아동맹단의 자금모집책을 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 집주인이 밀고할 우려는 없는 장소였다.

투쟁특위 가동, 자금 마련부터 인쇄물 제작과 가두시위까지

당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6.10투쟁특위가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6.10투쟁특위 위원 3인은 매일같이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 특위를 구성한 인물들은 헌신적이고 유능한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인쇄물 작성, 배포망 구축, 국외 망명 중인 상해 중앙간부와 연락, 운동자금 마련 등의 사업과 가장 중요한 대중 시위를 전개할 계획을 작성했다. 학생 조직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지도부에 포진한 당원을 중심으로 당일 가두시위를 담당할 조직을 구성케 했다. 제국의 군대와 경찰이 빽빽이 들어선 삼엄한 경계 속에서 가두시위는 체포는 물론이고 가혹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는 역할이었다. 굳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 역할을 맡은 이천진, 이병립, 이선호 등은 학교별로 시위 장소를 나누어 당일 조직화에 온 힘을 다했다.
화요회 계열이 주축이 된 조선공산당과 함께 당시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양대 산맥은 서울청년회 계열이었다. 따라서 6.10투쟁특위는 당연히 서울파에게 공동투쟁의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서울파의 거절로 성사되지 못했다. 투쟁에 조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세력은 크게 둘이었다. 당의 민족통일전선 방침에 따라 3월 초부터 의사를 타진해 오던 천도교 내 권동진파 세력, 그리고 조선공산당이 직접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이었다.
6.10투쟁특위는 조선공산당의 당원이며 인쇄 노동자인 민창식, 박래원을 중심으로 비밀 인쇄소를 꾸려서 시위 당일 뿌릴 유인물 인쇄작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인쇄 기계 2대를 구입해 인쇄하는 도중 주변에서 위조지폐 제작의 의심 속에 장소를 옮기면서까지 초인적인 노력으로 5월 말까지 무려 6만 매의 격문과 전단의 인쇄를 마쳤다. 인쇄물을 배포할 전국적 선전망도 구축했다. 특위는 전국 13개도 58개 지역에 배포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천도교의 조직선과 학생조직, 사회운동 조직선이 가동된 성과였다.
투쟁사업에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코민테른에서 사업비가 교부되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당시 조선공산당이 코민테른에 청구한 예산은 1년 기준 363,800원이었는데 모두 승인된 것은 아니다. 1926년 8월 1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진행된 강달영의 신문조서를 보면 청구한 예산 가운데 10만 원 내외로 승인받았다고 한다. 그중 강달영이 체포되기 전까지 교부된 금액은 모두 3,600원 정도라고 하니 승인 예산의 3.6% 정도만 교부된 것이다. 투쟁사업에 쓸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자금의 출처를 둘러싼 기록은 엇갈린다. 공식 사료에는 상해 망명 그룹의 자금이 유입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당시 6.10투쟁특위 위원이었던 이지탁의 회고는 다른 정황을 전한다. 실제 출처는 권오설의 동향 지인이자 운동 지지자인 이중현이라는 것이다. 이지탁은 이중현이 부친상으로 받은 유산 중 1천 원을 내놓았다고 증언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권오설은 이중현을 보호해야 했다. 그래서 취조실에서 일부러 상해의 김단야를 언급하며 허위 진술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자금의 출처가 어디였든 간에, 6.10투쟁특위에 속한 노동자, 학생 그룹은 비상한 각오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위에 열거한 그 많은 사업을 불과 20여 일 만에 차질 없이 진행했다.

제국 군대와 경찰 경계 속에 만세투쟁 성사

1926년 6월 6일, 모든 준비가 순조로워 보였지만 우연한 계기로 인쇄물이 유출 발각되면서 검거 선풍이 시작됐다. 6일 박래원을 시작으로 7일 권오설까지, 투쟁특위 지도부 3인이 모두 검거됐다. 고려공산청년회 소속 학생지도부들은 이처럼 긴급하고 위중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임무를 저버리지 않았다. 학생지도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천진은 뒷날 이렇게 증언했다. “삐라조차 모조리 빼앗겼고 지도자를 전부 잃은 우리들은 운동의 재출발을 부득이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자취방에서, 산속에서 유인물 1만여 매와 태극기 60여 장들을 제작해 당일 시위에 사용했다.
6.10만세투쟁은 경성 시내 곳곳에 깔린 경찰과 밀정, 군대의 감시와 동지들의 연이은 검거에도 끝내 이루어냈다. 일제가 그토록 봉쇄하고자 했던 순종의 국장은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헌신으로 거대한 항일투쟁의 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조선공산당은 이 투쟁으로 조직이 와해될 정도의 극심한 타격을 보았다. 당일 시위의 선두에 선 학생 그룹은 2백여 명가량이 현장에서 연행돼 구속됐다. 먼저 잡혀간 권오설, 민창식, 박래원, 박민영, 이지탁 등을 시작으로 수사의 창끝은 조선공산당 전체를 직접 겨누었다. 7월 17일에는 책임비서 강달영이 잠행 중에 체포됐고 8월 8일 권오설의 후임으로 공청을 책임졌던 전정관까지 검거됐다. 한 해 전인 1925년 12월에 시작된 조선공산당 조직 사건은 1926년 9월 7일 검사국에 송치될 때까지 검거자 수가 220명을 헤아렸다.
이중 조사 과정에서의 고문과 그 후유증으로 권오설, 박순병, 백광흠, 박길양, 권오상이 사망했다. 책임비서 강달영은 진술 과정에서 머리를 날카로운 모서리에 찧는 등 목숨을 건 조직 보위 투쟁을 벌였고 고문과 자해의 후유증으로 정신 이상을 겪다가 해방을 3년 앞둔 1942년 세상을 떠났다. 이들 모두 참혹한 죽음이었다.

‘삼각동 28번지’에서 지켜낸 정신의 계승
경성 한복판의 ‘삼각동 28번지’에서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가 순종 국장이라는 역사적 계기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이후 숱한 혁명가들이 검거되고 조직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이 집에서 내려진 결정은 식민지시기 최대 규모의 대중투쟁 가운데 하나인 6.10만세투쟁으로 이어졌다.
투쟁의 피해만을 놓고 볼 때 5월 2일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하지만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투쟁 속에서 조직하는’ 원칙을 견지했다. 6.10만세 투쟁 과정에서 숱한 투사들을 배출했고, 제국의 야만에 꺾이지 않는 투혼은 불과 3년 뒤 광주학생운동에 또렷하게 계승됐다. 1920년대 중후반에 벌어진 이 위력적인 대중투쟁은 1930년대에도 전국 곳곳에서의 당 재건 운동, 동맹파업, 소작쟁의 등의 밑거름이 됐고, 해방되던 1945년까지 민족해방과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여는 기반으로 자리 잡았다.

[참고자료]
○ 인터넷자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https://nl.go.kr/newspaper/
6.10 만세운동 기념사업회 http://www.610manse.or.kr/
공훈전자사료관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x.do
권오설 권오상 기념 사업회 https://osos.or.kr/
임경석의 역사극장 https://h21.hani.co.kr/arti/COLUMN/2273
○ 자료
이석태, 「사회과학대사전」 1948. 영인본 1987 한울림
전명혁, 「형사판결문으로 본 치안유지법 사건과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 선인, 2020
강만길 성대경 엮음,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 창작과비평, 1996
○ 도서
임경석,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 역사비평사, 2008
임경석, 『독립운동 열전』, 푸른역사, 2022
이준식, 『조선공산당 성립과 활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 논문
김국화, 「권오설과 권오상, 101인 사건 고문 수사의 피해자들」, 6.10만세운동 제99주년 기념학술회의 자료집, 2025
김진웅, 「권오설과 6.10만세운동」, 6.10만세운동 제99주년 기념학술회의 자료집, 2025
신주백, 「순종 사망 뒤 경찰과 군의 경계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7, 2024
박종린, 「6.10만세운동과 김단야」, 6.10만세운동 제98주년 기념학술회의 자료집, 2024 ; 「6.10만세운동과 고려공산청년회」, 제4회 6.10만세운동 학술심포지움, 2022
장석홍, 「6.10만세운동과 통일전선운동」, 국사관논총 90, 2000 ;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성격과 위상」, 6.10만세운동 기념 학술토론회, 2018 ; 「천도교 구파의 6.10만세운동」 북악사론 4, 1997
전명혁, 「6.10만세운동 시기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동맹의 활동」, 역사학연구연구 5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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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조선일보 사옥 위치(위 붉은 원)와 강달영 주거지인 삼각동 28번지 위치(아래 붉은 원)
[사진2] 6.10만세운동 시위도(출처 : 6.10만세운동 기념사업회)

[역사로 보는 오늘] 아동노동을 돌아보며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한 아동노동“노동하는 아이가 근면하다”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산업혁명은 아동노동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교육과 훈련이...
02/06/2026

[역사로 보는 오늘] 아동노동을 돌아보며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한 아동노동

“노동하는 아이가 근면하다”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
산업혁명은 아동노동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교육과 훈련이 아닌 타인의 이윤을 위해 일하는 ‘아동 노동자’가 생겨났다. 5살이 되면 성냥공장에서 방직공장에서, 조금 큰 8살이 되면 탄광에서 일했다. 유럽 각지에 ‘성냥왕’이 등장했지만, 한편에선 백린에 중독되어 죽어가는 어린 노동자들이 있었다.

제어 안 되는 아동노동 사용이 노동력 재생산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고 인도적 여론이 거세지자 국가의 간섭이 시작됐다. 1802년, 법으로 아동 노동자의 복지 개선 문제부터 규제를 시작하려 했다. 공장주들은 반대했다. 파산 위험이 있다, 자꾸 간섭하면 공장을 포기할 것이다, 외국으로 공장을 옮기겠다, 협박했다. 이후로도 법은 서너 번 더 제한 규정을 담아 통과했지만, 공장주는 무시했다. 1833년이 돼서야 9세 미만 아동 고용 금지, 13세 미만 아동의 8시간 노동 등이 입법되고 강제됐다.

아동노동의 가장 큰 원인은 절대빈곤과 자본의 이윤 추구를 사회적으로 전혀 통제하지 못한 데 있었다. 자본가의 눈에 아이들은 임금이 싸고 부리기 쉽고 손놀림이 재빠르고 파업 참가 가능성이 낮은 ‘노동력’일 뿐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작돼 1980년대까지 이어진 한국의 아동노동

1911년 일본 공장법이 아동과 여성의 노동을 제한하자 고무신공장, 방직공장 등이 한반도에 세워졌다. 해방 이후 “성냥만은 자급자족”이라는 구호가 등장할 정도의 필수품이었던 성냥공장은 이천, 수원, 시흥, 군산, 목포, 부산, 신의주, 청진 등지에 세워졌다.
노동조건은 열악했다. ‘조선인촌(성냥)회사 직공 356명 파업’ 기사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임금을 현재보다 5할 이상 인상하여 줄 것, 노동시간을 여덟 시간으로 하여줄 것, 직공들의 식당을 설비하여 줄 것, 무리 해고를 절대 반대, 감독을 쫓아낼 것”을 요구했다(조선일보 1932.5.4).

아동노동은 광범위했다. 해방 후 이른바 아동노동법(법령 112호)은 1946년 9월 발령돼 한 차례 보류 후 1947년 6월 1일 시행됐다. 법령 발령 후 공장, 회사, 작업장, 요리점, 상점, 이발소 등에서 일하던 14세 이하 아동들은 일을 그만뒀다. 미군정은 아동노동법 시행으로 인해 공장 회사를 떠나게 되는 14세 이하 아동이 남조선에 수만 명이나 된다고 했다. 운수부 철도국에서는 “오는 2월(보류 전 시행예정일) 시행을 앞두고 이미 2천 명이나 되는 유년공에게 공장을 떠나도록 할 준비에 착수했다”고 한다(조선일보 1946.12.3).

한국은 법으로 아동노동을 규제하고 있음에도 아동노동 근절은 이뤄지지 않았다. 1970년 청소년들은 농수산업에서 53.3%가, 기능공 생산공정 및 단순노무자로 21.1%가 일했다(경향신문 1971.4.21). 해방 후 인구가 급격히 늘어 두 배가 된 상황에서 아이들은 노동자의 부양 부담을 증가시켜 경제성장에 큰 짐이 된다고 분석하는 사회(‘공업화와 노동력’, 동아일보 1971.8.27)에서 아동노동이 사라질 리 만무했다.

“14살 소년공이 일이 지겨워 자기가 다니는 공장에 불을 질렀다”는 기사가 1988년 한겨레신문(1988.6.28)에 실렸다. 하루 11시간 노동에 지친 소년이 공장만 없어지면 일 안 하고 가고 싶은 학교에도 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단다. 이미 1973년 ILO는 일할 수 있는 아동의 최저연령을 의무교육을 마친 나이인 15세로 정했다.

세계화, 아동노동을 전 지구적으로

부산에 있던 삼화고무는 1974년, 미국 나이키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 생산을 시작했다. 3천 켤레에서 시작해 수만 켤레를 수출했다. 이어 국제상사, 동양고무, 태화고무도 나이키 운동화 만들었다. 나이키는 운동화로 유명세 반열에 올랐다. 고무신, 군화를 거쳐 운동화 생산으로 한국의 신발산업은 탄탄 가도를 달렸다. 1970~1980년대 부산 신발산업 고용인구는 5만 명이 넘었다.
1990년대 나이키가 더 싼 임금을 줄 수 있는 곳으로 떠나자 한국 신발업체는 줄도산했다. 반면, 나이키는 세계 아동노동에 기대 자본을 확장해갔다. 1995년 이후에야 전 세계 나이키 공장에서 16세 미만 아동 고용을 금지했다.

세계화는 자본의 세계화다. 한국의 그 많던 공장은 더 싼 임금을 찾아 떠났다. 방글라데시 의류공장 노동자는 1983년 1만 명에서 1997년 130만 명으로 늘었다. 자본은 말한다. “개발도상국에서 아동노동은 가난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자발적 노동이다.”

6월 12일 세계 아동노동 반대의 날

1995년 4월 16일 파키스탄에서 12세 소년이 피살당했다. 소년은 4살 때부터 부모에 의해 카펫 직조공장에 보내져 일했다. 그는 1994년 스톡홀롬에서 열린 노동문제 회담에 참석해 노동실태를 고발했고 미국 신발 제조사가 수여하는 ‘노동하는 어린이 상’도 받았다. 파키스탄의 몇몇 카펫공장들이 문을 닫으며 암살위협을 당하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다(경향신문 1995.4.20).

그즈음 세계무역기구가 새로운 통상의제를 논의하면서 노동, 환경 등 사회적 기준과 무역을 연계하는 방안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14살 이하가 2억 5천만 명으로 추산되는(전 세계 어린이의 20%) 아동노동을 근절해야 한다는 것도 쟁점이었다. 개발도상국 대부분이 격렬히 반대했다(한겨레신문 1996.12.11). 당시 UN 발표에 따르면 세계 모든 어린이에게 무상(초등)교육을 시행하는 데 드는 비용은 전 세계 군비의 1%도 안 되었다.

1998년 1년간 아동노동 반대 세계 행진이 있었다. 사회운동 조직들은 필리핀에서 시작해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를 거쳐 스위스 제네바까지 행진했다. 1999년 6월 ILO협정 182조 ‘최악의 아동노동 금지 협정’이 체결됐다. ILO는 2002년 6월 12일을 ‘세계 아동노동 반대의 날’로 정했다. 산업혁명과 함께 아동노동이 문제 되기 시작한 지 200년이 지나서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국가에 아동노동 규제 법령이 존재한다.
그런데 2024년, 유엔은 전 세계적으로 약 1억 3,800만 명의 어린이가 여전히 농장과 공장 등에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5세에서 17세 사이 어린이 전체의 약 7.8%에 해당하는 수다. 아동 노동자 중 약 40%가 특히 위험한 업무에 종사하고 있단다.
아동노동은 지구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했을 뿐 자본을 위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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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미국 탄광에서 일하는 아동 노동자들(루이스 하인, 1911)

[현장 이야기] 다시, (최저)임금을 생각한다정용재(노동자역사 한내 운영위원)23년치 연봉에 달하는 성과급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노동자가 받는 올해 성과급(만!) 6억에 달한다 한다. 2026년 적용 최저임금(시급 1...
26/05/2026

[현장 이야기] 다시, (최저)임금을 생각한다

정용재(노동자역사 한내 운영위원)

23년치 연봉에 달하는 성과급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노동자가 받는 올해 성과급(만!) 6억에 달한다 한다. 2026년 적용 최저임금(시급 10,320원)을 적용받는 노동자의 23년 치 연봉에 달하는 금액이다. 역대급 성과급 지급에 대해 산정 기준의 투명성과 공정성, AI 반도체산업의 경쟁력, 주주환원과 노동분배 가치 충돌, 영업이익 연동 성과급의 임금 여부 등 온갖 논란과 주장이 쏟아졌고 한국 사회를 휘감아버렸다. 막대한 보상액에 대해 대다수 노동대중의 상대적 박탈감까지 더해져 파업 직전 노사 합의 이후에도 여진과 파장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그러나 파업이라도 하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저주를 퍼부어대던 입들은 삼성전자의 천문학적인 이익의 원천이 어디인지, 누구의 죽음·질병과 노동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정의로운 분배의 기준과 대상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따지고 묻지 않는다. 과연 오늘날 노동자의 임금은 무엇인가.

35년 전 노동조합 소식지에 적힌 ‘최저임금제’

노동소득분배율뿐 아니라 임금노동자 내 불평등과 격차마저 날로 커지는 오늘, 소장 자료의 전산화를 위해 한내 서고에 켜켜이 쌓여있는 옛 자료를 살펴보던 중, 빼곡한 손글씨로 채워진 한 노보에 시선이 꽂혔다. 다시 노동자의 임금을 생각한다.

도래한 최저임금의 계절

수억대 성과급과 치솟는 주가에 희비가 교차하는 요즘, 최저임금이 관심이라도 있을까 싶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내년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 회의가 4월 21일 1차 전원회의를 시작으로 알게 모르게 진행되고 있다.
대통령이 임명한 3년의 임기 최저임금위원장은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인 권순원 공익위원이다. 그는 윤석열 정권 시절 ‘미래노동시장연구회’를 주도하며 69시간제와 각종 노동개악(최저임금에 한정하더라도 업종별 차등, 주휴수당 폐지, 고령노동자 차등 적용 권고)을 설계했다. 해괴하기 이를 데 없는 ‘국민경제생산성 증가율’ 기반 산출 공식을 들이대며 지난 3년간 평균 2.36%로, 역대 최하 인상률을 결정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민주노총을 찾아가 “잘하겠다” 사정하니 민주노총은 애초 사퇴 요구를 철회하고 회의에 복귀했다. 민주노총의 결정이 너무 안일한 태세 전환 아닐까 우려가 깊어진다.
2026년 현재 고용노동부와 경총의 자료에 근거해도 최저임금 영향 노동자는 290만 명,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자는 276만 명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최저임금은 한국사회 대다수 노동자의 사업장 임금, 사회임금의 기준으로 기능하고 있다. 공공부문 임금가이드라인, 공무원 보수, 시중노임단가, 지자체 생활임금은 최저임금 인상률에 따라 동반 인상되고 있으며 출산육아급여, 실업급여, 공공일자리급여, 산재급여 등 각종 사회임금 산정의 기준이 되고 있다. 한국사회 노동자 누구도 최저임금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중차대한 기준이다.
올해 민주노총은 2027년 적용 최저임금으로 시급 13,070원(26.5%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물가와 경제성장률 증가치를 깔고 실제 노동자 가구 생계비용에 따른 요구다. 최근 고물가·고환율·고금리 지속으로 실질임금의 삭감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대폭 인상은 당연하고도 절박한 요구인데 그에 걸맞은 태세를 갖추고 투쟁을 준비하는지 의문이다. 최저임금의 중차대함에 비춰 연간사업이 진행돼야 하고 4~6월 때마다 진행하는 달력 사업이어선 안 된다는 평가도 반복되지만, 여전히 관성적 대응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1988년 최저임금법이 제정되고 시급 462.5원에서 시작된 한국 최저임금제의 역사도 38년에 달한다. 이에 반해 최저임금법 제4조(최저임금의 결정 기준과 구분)에 명시된 ‘노동자의 생계비, 유사노동자 임금, 노동생산성, 소득분배율’에 기초한 논의와 결정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모든 임금 투쟁이 그러하듯 ‘최저임금 1만 원 운동’처럼 오직 대폭 인상을 위한 기획, 노동대중의 집합적 실천과 투쟁의 결과에 따라 최저임금이 결정돼왔다. 최저임금위원회 회의 결과만 바라봐서는 안 되는, 요구에 걸맞은 투쟁이 실천돼야 할 이유다.

최저임금 적용 대상 확대에 주목·쟁취해야

올해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만큼 중요한 것은 최저임금 적용대상의 확대다. 책임 회피와 분절적 고용구조의 확대로 ‘사장님’ ‘개인사업자’로 둔갑해 860만 명을 훌쩍 넘어선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들은 과업 단위 보수를 받는다는 이유로 “도급노동자의 최저임금액을 따로 정할 수 있다”(최저임금법 5조 3항)는 조항이 있음에도 최저임금 산정과 적용에서 지금껏 제외돼왔다. 수년간의 끈질긴 요구와 투쟁 끝에 올해 드디어 최저임금위원회 안건 의제로 상정됐다. 모든 노동자의 최저수준 임금을 정하는 최저임금법의 취지를 살리고 임금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올해 무엇보다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 최저임금 산정이 이뤄져야 하고 이에 걸맞은 최임위 교섭과 대중투쟁이 집중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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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노협 시절 민주노조의 조직쟁의부만큼 빠지지 않는 부서는 조사통계부였다. 복잡한 재무재표와 경영지표를 들이대며 “회사가 망한다” “시기상조다” “턱없이 높다”는 자본의 임금억제 논리에 맞서는 방법은 별다른 것이 없었다. 처참한 임금·노동조건에 대한 폭로를 넘어 활동가들은 현장의 노동시간, 가계 지출내역, 동종 사업장의 임금 수준, 시장 물가를 발로 뛰며 연구하고 조사했다. 십수 쪽에 달하는 빼곡한 문항의 전 조합원 설문은 그야말로 기본활동이었다. 각종 생필품 가격의 변화 추이와 물가 조사를 위해 시장과 거리를 누볐다. 그 결과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부당하게 일하고 있는가를 객관적으로 밝히고 임단협 갱신 교섭의 근거와 무기로 활용했다. 민주노조운동은 십수 년간의 사업장 임금과 최저임금 요구를 만들어내는 경험 끝에 ‘노동자 생계비 모델’을 독자적으로 산출, 개발해 최저임금 대응과 함께 매년 임투에서 강력한 무기로 활용했다.
오늘의 임금 투쟁의 준비와 대응 방식은 당연하게도 변화된 세상에 조응해야 할 것이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노동의 논리와 요구를 만들어내기 위해 쏟는 땀과 노력, 내 사업장의 임금과 모든 노동자의 임금이 연결되어 있다는 시야와 관점의 확장, 불평등 타파를 위한 실천과 투쟁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 바로 35년 전 투박하고 우직한 손글씨와 그림으로 써 내려간 노보가 이를 알려주고 있다.

[사진] 7호, 서전노조,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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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운동사』 책담회 전노협이 결의한 노동운동사 30년 만에 발간노동자역사 한내가 2026년 5월 13일 민주노총 교육장에서 『한국노동운동사』 책담회를 열었다.양규헌 한내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전노협이 해산할 ...
19/05/2026

『한국노동운동사』 책담회


전노협이 결의한 노동운동사 30년 만에 발간

노동자역사 한내가 2026년 5월 13일 민주노총 교육장에서 『한국노동운동사』 책담회를 열었다.
양규헌 한내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전노협이 해산할 당시 백서와 운동사를 내자고 결의했고 노동자역사 한내가 산별노조, 단위노조, 투쟁 현장의 역사를 정리해왔지만, 운동사 발간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었는데 30년이 지나 그 일을 해냈다”며 “다만 이것은 시작일 뿐 변혁적 노동운동, 평등사회 건설을 내걸었던 전노협운동이 다시 살아나기를 기대한다”라며 책담회 시작을 알렸다.

“토론·논쟁거리 제공하는 책이자 날카로운 격문”

축사에서 단병호 민주노총 전 위원장은 “발간사, 서문, 목차만 보고도 글쓴이 김태연 동지가 일관되게 추구해왔던 운동의 입장, 견해, 즉 변혁적 노동운동이라는 관점에서 『한국노동운동사』를 편찬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며 “1987년 이후 힘차게 달려온 우리 민주노조운동의 변혁 지향성은 엷어지고 그 자리에 실리적 노동운동이 확장해가고 있는 시점에 역사를 돌아보면서 다시 반추해보는 것은 매우 뜻깊다”라고 의미를 두었다. “상당한 토론과 논쟁거리를 제공하는 책인 만큼 이 책이 누군가의 서고에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일독하고 치열하게 고민해 우리 운동의 자양분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도 축사에 나서 “운동이 고립되고 노동자 정치 존재감이 사라진 이 시대에 저자는 이 방대한 기록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우리가 여전히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근거를 담았을 거라 믿는다. 저자는 학습된 패배주의를 깨야 한다, 거대 담론의 승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승리를 통해서 뭉치면 우리가 해낼 수 있구나, 우리는 그런 집단이구나, 우리는 노동자계급이구나, 그런 내용을 담았을 것이다. 낡은 노선투쟁에 대한 우리 사진을 돌아보는 시간도 적혀 있을 것이다”라며 책에 대한 바람을 드러냈다. 이어 “현시기에 이 책 3권의 마지막 장이 결코 끝은 아닐 것”이라며 “새로운 세대가 써 내려가야 할 서문이자 운동판에 던지는 날카로운 격문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노동운동 전체 포괄하고 평가와 전략 담아내”

저자 김태연과 이야기 손님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저자는 1980년 5월에 한국노동운동의 주요 과제가 제기됐다고 봤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으로부터 임금, 노동시간, 노동안전 등이 기본과제의 하나로 제기됐고, 2천여 명이 모여 노동법 개정 결의대회를 개최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법개정 운동이 또 하나의 기본과제로 제시됐다. 당시 운동 주체들이 정한 과제였다. 여기에 덧붙여 민주적 자주적 노동조합의 전국조직이 있어야 한다, 노동자의 정치조직이 있어야 한다,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실천이 시작됐다. 그것이 3대 대전환 과제였다”고 밝혔다. “이 책은 우리 운동이 지난 시기 이 과제를 어떻게 찾고 만들어가고 실패하고 쟁취하며 왔는지, 어디쯤에 있는지, 못 이룬 것은 무엇인지를 밝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조돈문 사회공공연구소 이사장은 『전노협백서』나 『민주노총 30년사』와 달리 『한국노동운동사』는 노조로 포괄되지 않는 노동운동단체, 활동가들을 담아냈다는 점과 평가가 각 부분에 녹아 있고 마지막에는 전망과 전략을 이야기하며 토론거리와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샀다. 또 “현재 진보진영의 상태가 암울하기도 한데 김태연 동지가 긍정적 톤으로 써 줘서 고맙다. 특히 운동의 한복판에 있던 당사자로서 반성도 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반성할 거리를 던지고 있다. 사회변혁의 중심이었던 민주노동운동이 시민운동에 자리를 내준 상황, 주변화되고 고립화된 상황에 모두가 책임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념적 순수성을 지켜 훌륭하다 자평하면서도 전체 운동으로 볼 때는 왜소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필자의 평가에 동의한다”고 밝혀 운동의 현 상태를 성찰했다. 그러면서도 “이 난관을 헤쳐나갈 방안으로 우리가 연대하고 투쟁할 지점을 찾으신 것 같다. 서로 이질적이지만 힘을 모을 수 있는 공통분모로 사회주의적 가치를 제기했고 동의할 수 있겠다. 기왕 화두를 던졌으니 AI, 기본소득, 정치세력화 등 전망과 전략을 좀 더 고민할 후속 작업까지 슬쩍 제안해보시면 좋겠다”고 덧붙여 이후 토론을 이어가자고 제안했다.

“신자유주의 아래 모든 것이 계급운동”

저자는 IMF 외환위기 시기를 ‘통한의 1998년’이라 표현했다. 그로부터 시작된 비정규 노동운동의 주체인 비정규직이제그만 차헌호(금속노조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지회) 활동가는 “50년 역사에 30년을 차지한 게 비정규 노동운동인데, 그 시작점이 ‘노동운동의 패배’였다는 게 참으로 아프다”고 운을 뗐다. “그때부터 사회적 합의가 시작됐고 놀랍게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 민주노조운동이 가장 휘청거렸다”면서 기간제 2년 허용, 파견제 확대, 복수노조 창구단일화, 탄력근로시간 확대, 최저임금 산입범위 등 반노동정책이 현장에 적용돼 온 현실을 이야기했다. 특히 “문제는 이 상황이 현재도, 올해 노동절에서도 재연됐듯 역사 속 아픔이 여전히 현재 운동에서 반복되고 있다”며 운동의 주체로서 현장투쟁을 강조했다.

미류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 상임활동가는 “책에 인권운동이 연대운동을 주도하게 됐다는 표현이 있던데, 희망버스, 세월호 투쟁 인권운동이 더 진전하게 된 시기가 있었던 것은 맞다. 이것은 어떤 가능성의 실마리고, 그 가능성은 노동운동이 그 모든 것이 노동운동이라고 선언하고 실천하는 만큼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한국 사회의 변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저자는 여전히 사회적 연대투쟁의 자리가 노동운동으로부터 어디쯤 있는지를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이후 우리 운동이 여기에 답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노동운동이 변혁운동의 한가운데 있었던 것은 억압받는 민중을 대표하는 보편자로서 노동자계급이 계급적 요구를 고민해왔기 때문이다. 이제 기후 위기도 고민하고 신당역 지하철 여성노동자 사망 사건도 계급적 요구로 여겨야 할 때다. 그리하여 3권에서 서술한 운동이 연대투쟁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싸워나가야 하는 ‘노동운동사 자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었다”라며 노동자계급운동을 주문했다. 아울러 “변혁을 지향하는 운동 세력이 왜 대중투쟁의 힘을 만드는 데 실패했는지를 더 평가해야 한다, 그 평가를 같이하는 것이 이후 역사를 써가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현장투쟁 기반으로 운동의 전망 만들어가자”

저자는 “노동자역사 한내로부터 요청받기도 했지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 집필을 시작해 4년이 지났다”며 그 시기 글을 쓰지 못하던 때도 있었노라고 고백했다. 저자는 “특히 2002년, 2003년 발전 파업 후 시기를 서술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며 “나도 책임 당사자였던 4.2 총파업 철회는 IMF 외환위기 후 정리해고로 고통받으며 투쟁해온 현장을 살릴 기회를 무너뜨렸다는 점, 이후 대중투쟁이 실종에 가깝게 힘을 잃었다는 점, 사회적 교섭에 매달리는 민주노총 집행부가 계속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고 반성했다.

책담회와 함께 자본의 세상에 맞선 민주노조, 노동자정당, 현장조직, 사회운동조직과 활동가들의 승리와 패배, 진군과 후퇴를 가감없이 남긴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이 ‘정파’를 떠나 매 시기 투쟁에 나섰던 이들의 깊이 있는 고민과 성찰을 불러올 수 있다면 운동의 전망은 밝을 것이다. 현장과 지역 곳곳에서 토론회가 열리고 공부 모임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책 속 주요 투쟁에 함께해 온 저자는 언제든 누구에게든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날 책담회에서 3권 6부로 구성된 책의 핵심 대목을 박성희, 나영선, 유흥희, 이백윤, 강철, 박경득 동지가 낭독했다. 이어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 책을 쓰면서 일관되게 유지한 관점을 적은 서문의 한 단락을 참가자 60여 명이 함께 읽으며 책담회를 마무리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노동자계급의 투쟁 중심은 현장이었다. 이는 ‘현장을 중시해야 한다’라는 원칙론적 언사가 아니다. 노동현장 곳곳에서 치열한 투쟁이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노동조합 상급조직과 정당조직이 흔들리고 후퇴할 때도 노동현장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든 현장조직이든 조직을 만들어 자본과 정권에 맞섰다. 한국노동운동사의 출발점은 현장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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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책] 한국노동운동사 - 멈추지 않는 노동해방의 여정 왕의조(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한국노동운동사의 주요 장면들에는 반드시 노동해방의 구호와 깃발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볼드모트’와도 같은 말이 티브이나...
14/05/2026

[함께 읽는 책] 한국노동운동사 - 멈추지 않는 노동해방의 여정

왕의조(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한국노동운동사의 주요 장면들에는 반드시 노동해방의 구호와 깃발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볼드모트’와도 같은 말이 티브이나 신문을 비롯한 대중매체에 등장한 적은 잘 없다.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외쳤던 그 단어를 이제는 쉽사리 찾아볼 수조차 없다니 말이다. 어쩌면 그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목표가 없는 배는 배가 아니라 부표에 불과하다. 부표는 퇴행하거나 표류한다. 노동해방의 목표는 폐기된 것일까. 찬란했던 그 깃발은 이제 내려진 것일까.

“청계피복, 원풍모방 등 1970년대의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한 대중운동은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노동운동의 방향을 재정립하고자 했다. (중략) 광주민중항쟁 후 신군부는 노동법을 개악해 인민의 노동3권을 완전히 박탈했다. 따라서 노동권의 쟁취는 항쟁 이후 전체 인민의 가장 절박한 요구이자 동시에 한국노동운동의 기본과제가 되었다.”

“민주노총은 위력적인 총파업을 전개했으나, 신자유주의 공세를 지연시켰을 뿐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민주노총이 노개위 참가를 통해 거머쥐었던 정리해고제 법제화는 양날의 칼이었고, 이는 곧 자본과 정권의 무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법개정 총파업이 패배한 투쟁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제도의 폐지를 위해 제2, 제3의 총파업을 선언하며 투쟁에 나섰다.”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의 구심이었던 일차적인 이유는 당대의 가장 첨예한 갈등이 모이는 곳이 곧 노동자의 일터와 사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의 해방을 향한 열망은 다양한 사회적 억압의 반작용이었고, 이와 같은 열망은 이후 한국사회의 계급적 이해와 요구를 포괄하는 ‘내셔널센터(민주노조의 중앙조직)’와 ‘산별노조의 건설’을 촉구하는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시기의 사회운동이 지녔던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이다. 노동운동이 ‘민중 항쟁’을 성찰한다는 것은 얼마간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막상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본다면 그렇게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권과 자본은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사회운동의 요구를 쉽게 부문화하거나 파편화하여 협상과 거래의 대상으로 삼기에, 사회운동은 자기 이해와 요구에 고립되는 수세적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대의 노동운동은 연결되고 연대함으로써 대중운동의 구심으로 작용하고자 노력해왔고, 이는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표현되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회운동의 의식이 지역이나 단위사업장에 갖히지 않고, 전체 사회의 정치적 의제에 책임과 소명을 감각하며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노선과 정파를 초월하는 어떤 ‘사적(史的) 원칙’이 작용했다는 뜻과도 같다. 이처럼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역사적 원칙을 발명하고, 집단적으로 그것을 사유하며 또 외화시켜왔다는 점에서 그 운동성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노동해방이라는 구호는 ‘계급투쟁의 축적’이 발명해낸 하나의 상징이자 구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정당들은 광장투쟁에서 주변부로 밀려났다. 거대한 촛불광장에서 진보정당들의 존재는 미미했다.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정당들은 조직력이 취약했다. 원내정당인 정의당은 탄핵 외의 정치적 방향을 제출하지 못한 채 보수 정치세력들과 차별성을 보이지 못했다. 진보정당들은 광장투쟁의 연단에서 배제됐다. 광장투쟁 과정에서 진보 정치세력이 보수 양당 정치세력의 대안으로 설 수 있는 정치적 전망을 만들어 내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한국노동운동의 두 가지 큰 방향인 민중해방노선과 민족해방노선은 각 노선의 궁극적인 목표인 ‘해방’보다는 단기적인 정치적 생존 전술에 치중했다. ‘NL-PD’ 대립 구도가 역사적 소명을 다하고 낡아빠져 ‘죽은’ 대립 구도로 치부되지만 이러한 전술적인 문제들에서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대립 구도로 작동하고 있다. 대부분의 운동 세력이 여전히 ‘해방’을 추구하고 있는 한국노동운동은 그 해방이 무엇인지 재정립하고 각자의 강령 문건에만 존재하는 사문화된 변혁성이 아닌 투쟁과 조직의 잣대가 되는 살아있는 변혁성을 정립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최근 수년간 한국노동운동 내 여러 세력이 ‘체제전환’을 들고나오는 것은 이런 요구의 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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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은 한국노동운동사의 정체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포괄하는 말이다. 역사는 하나의 정체성이며, 이는 역사의 모든 시기에 도사리면서 국면마다 기준이 되는 하나의 ‘상징계(Imaginary)’이기도 하다. 동시에 원칙이라는 말은 언제나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밝히는 구체적인 예시와 근거들이 필요하다. 「한국노동운동사」는 철저하고 꼼꼼하게 이 캄캄한 지도를 밝혀내고 있다.

어떤 도시에는 산업박물관과 노동박물관이 병존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두 가지 관점이 대립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역사책을 넘길 때마다 왕과 영웅들의 얼굴만이 등장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사회는 현실정치와 사회운동의 두 바퀴로 나아가는 것이지 위정자들의 실정이나 선정 따위로 역사를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환하게 웃는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퍼스트 펭귄, 넥스트 제너레이션, 그리하여 숭고한 AI 시대의 문을 여는 유력한 정치인들까지. 그들의 다양한 표정이 1면을 장식하고, 결국엔 일그러진 만평과 냉소와 훈수에 찌든 칼럼으로 마무리하는 오늘의 역사에 그만 실증이 나버린 탓일까.

문학이나 사회비평이 새로운 세대(Next generation)를 구분하는 핵심적인 방식 중에 한가지는 이전 세대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음악이나 미술, 심지어는 자연과학에도 적용된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역사성을 감각하고 있는가’ 하는 뜻과 같다.

새로운 세대는 창의성이 아니라, 역사성에서 나온다. 시인 김수영은 인간의 역사를 일컬어 ‘거대한 뿌리’라고 했다. 뿌리가 잠식당할 때 식물은 숨을 거둔다. 노동자의 역사도 그렇다. 역사를 파악하는 것은 범인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원칙과 해방은 역사적인 것이고 그 때의 사회운동이 주요하게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무엇인지를 돌이켜보아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세대가 계승해야만 하는 것은 단지 ‘멈추지 않는 투쟁’이 아니라, ‘거대한 뿌리에의 감각’이다. 「한국노동운동사」는 그 뿌리가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가자, 노동해방!”이라고 외치고 있다.

08/05/2026
[여기, 우리의 이야기] 잔인한 계절, 죽은 자와 산 자들의 존엄을 묻다. ‘함께 비애에 빠지는 것, 그것이 연대의 시작이기에…이은주(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내가 매일 마주하는 이들은 세상의 경계 밖, 사회적 시스템...
28/04/2026

[여기, 우리의 이야기] 잔인한 계절, 죽은 자와 산 자들의 존엄을 묻다. ‘함께 비애에 빠지는 것, 그것이 연대의 시작이기에…

이은주(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내가 매일 마주하는 이들은 세상의 경계 밖, 사회적 시스템의 보호에서 배제되어 있는 이들이다. 현장에서 일어난 명백한 사고도 산재로 인정받지 못한 노동자,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고 쫓겨난 이주노동자, 불법 촬영의 숨은 폭력에 영혼이 난도질당해도 사측으로부터 아무런 보호조차 받지 못한 노동자다. 그리고 조직적 소외 끝에 스스로 생을 등진 이와 그 죽음의 진실을 붙들고 처절하게 바둥거리는 유가족들까지. 그들의 이야기는 진술서나 보고서의 문장이 되기 전, 이미 누군가의 피와 눈물로 쓰인 생존의 기록이다.

보름 전, E7-3(조선업 용접공)비자로 입국한 지 1년 만에 해고와 브로커의 협박 앞에 놓인 한 이주노동자를 만나기 위해 급히 노동부 조사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목격한 가해자의 논리는 치밀하고 정교했다. 근로계약서상 장소가 아닌 곳으로 파견을 보낸 불법 행위는 ‘피해 노동자의 요청에 의한 배려’로 둔갑해 있었고, 브로커를 통역자로 대동하고 매수된 동료들까지 사측 증인으로 나서 조직적인 거짓을 늘어놓았다. 사람이 아닌 '필요 노동력'으로만 취급하는 이주 정책이 불러온 결과였다. 불법과 위협이 ‘정당한 조치’라는 탈을 쓰고 피해자를 압박하는 현장은 그야말로 ‘정교한 악마’의 모습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해고를 철회하는 합의를 했다. 대신 그는 일자리를 잃지 않고 추방되지 않기 위해 체불 임금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주노동자와 함께 노동부를 나오며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정답 없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는 온전히 듣고 함께했는가? 사건이 쌓여갈수록 정리의 기술은 늘어갈지 모르나, 마음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는다. 남은 피해자의 상실감을 보며 나는 다시금 뼈저리게 느낀다. 피해자의 고통은 늘 투박하고 파편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통받는 자 곁에서 함께하는 활동은 어쩌면 피해자의 파편화된 고통을 듣고 퍼즐을 맞추어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의문점을 찾고, 가짜 배려 뒤에 숨은 진짜 폭력을 찾아내며, 피해자의 부서진 진실을 하나의 온전한 서사로 구성하는 일 말이다. 이 거대한 비극을 진술서, 보고서, 때로는 기자회견문이라는 고작 몇 장의 종이 위에 가둬야 한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서글퍼질 때가 있다.

또한 그 퍼즐을 맞추며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되새김질한다. 나의 언어가 권력이 되어 피해자의 진실을 검열하고 있지는 않은지, 수많은 사건 속에서 타인의 고통을 ‘사례’나 ‘데이터’로 치부하며 무뎌지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한다. 피해자의 거친 목소리를 정돈한다는 핑계로 그들의 날것 그대로인 진실을 나의 논리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내가 내딛는 발걸음, 말 한마디, 적어 내려가는 한 줄이 누군가의 생존과 존엄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서늘한 책임감을 잊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특히나 ‘정형화된 조사 체계’라는 틀 안에서 객관성이라는 미명 아래 그 아픔을 재단하거나 계량화해야 한다는 오류에 빠질 때가 많다. 하지만 인간의 아픔을 어떻게 자로 잰 듯 나누고 무게를 달 수 있겠는가. 조사 과정에 편견이 개입되는 순간, 우리의 시선은 은연중에 가해자의 논리에 동화되기도 한다. “왜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나”, “그 상황에서 그것이 상식적인가”라는 질문들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비수가 되어 꽂히는 2차 가해일 뿐이다.

조사기록에서, 부당해고를 다루는 근로감독관의 무심한 말투에서, 그리고 노동자의 상처 치유를 지원해야 할 업무상질병판정위원들의 심의 과정에 규정만을 내세우는 서늘한 풍경 속에서, 고통에 등급을 매기려는 시도가 도리어 피해자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비극을 현장에서 목격할 때 내 마음에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것을 경험한다. 가해자의 유창한 변명이 조사단의 중립성을 집어삼키고 진실이 '언어의 기세'에 눌려 왜곡되는 과정을 목격하는 일은, 조사의 탈을 쓴 또 다른 폭력이 재생산되는 생생한 현장을 지켜보는 일과 같았다. 이때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복잡한 감정은 결코 개인의 예민함이 아니다. 나는 그 불편함을 붙들고 질문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이 끝없는 질문과 막막함이야말로 나로 하여금 무너져가는 진실을 지탱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켜낼 여정에 나를 곧추세우는 힘임을 깨닫는다. 질문이 멈추는 순간, 나는 고통을 재단하는 행정가가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답이 보이지 않아 괴롭고 무력감에 슬픔이 깊어질 때도 있지만, 확신보다는 의심을, 매끄러운 결론보다는 투박한 질문을 품고 그들의 곁에서 걸어가려 한다.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함께 묻고 함께 비애에 빠지는 것 자체가 연대의 시작임을 믿기 때문이다.

4월 28일 ‘세계 산재 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지나 노동절로 향하는 이 계절은 너무도 잔인한 시간이다. 노동절이 ‘국가 지정일’로 정해졌고 노동자의 권익이 향상되었다는 화려한 수사들이 기념사를 채우겠지만, 그 화려한 그림자 뒤에서 우리는 여전히 동료를 잃는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의 굴레를 멈추기 위해 투쟁하던 화물노동자가 경찰의 비호 아래 살해당했다. 그 현장에서 함께 죽지 못했다며 동료는 자책의 눈물을 흘린다.

노동절이 기일이 되어버린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의 피해 노동자와 양회동 열사, 그리고 이천 물류창고에서 쓰러져간 이들까지. 오늘 우리가 지켜내지 못한 동료의 빈자리가 더 크게 다가오는 이 시기, 나는 다시금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의 연대는 죽음을 막지 못한 자책을 넘어, 산 자들의 존엄을 지키는 단단한 방벽이 되고 있는가.” 노동자들의 부서진 진실을 맞추는 일, 슬픔이 분노가 되고 분노가 다시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될 때까지 우리는 이 질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저 들리는 대로, 보이는 대로 그 아픔의 곁을 지키는 것. 비록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비애가 나를 짓누를지라도, 나는 이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이 비애야말로 우리가 고립된 섬이 아니라, 서로의 고통에 응답하는 존엄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억울한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은 그와 그들이 한평생을 살아오며 지키고자 했던 세상을 향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슬픔과 분노는 애도 투쟁의 불씨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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