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역사 한내

노동자역사 한내 를 통해 한 시대 노동운동의 역사를 지켜낸 김종배 동지의 유지를 계승하고

노동운동가 김종배 추모사업회는 를 통해 사라질 뻔했던 한 시대 노동운동의 역사를 지켜낸 김종배 동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노동운동 역사자료실을 만들어 노동운동 자료를 수집 보관해 왔습니다. 2007년 추모사업의 차원을 넘어 노동운동진영 전체의 사업으로 발전시키고자 노동자역사 한내를 설립하고 열사정신계승으로 주요하게는 노동운동역사자료실 운영을 통해 노동자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미래의 건강한 노동자 주체의 양성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거슬러보면] 5·18, 이럴 거면 차라리 잊어달라이황미(노동자역사 한내 기획국장)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은 계엄군에 진압됐다. 광주 민중을 학살해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5·18을 북한의 지령을 받은 불순분자와 ...
19/08/2026

[거슬러보면] 5·18, 이럴 거면 차라리 잊어달라

이황미(노동자역사 한내 기획국장)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은 계엄군에 진압됐다. 광주 민중을 학살해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5·18을 북한의 지령을 받은 불순분자와 폭동 세력의 난동이라고 했다. 광주의 실상에 관한 언론 보도는 전면 금지됐다. 진실을 알리고,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외치면 잡혀가고,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구속됐다. 유가족도 피해자도, 광주 사람 그 누구도 그날을 이야기하면 모두 불법이었다. 1987년 민주화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새로운 대통령 역시 광주학살의 주범이었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도 5·18 광주민중항쟁은 ‘광주 소요사태’였다.

그래야 했다. ‘북한군이 개입해 일으킨 소요’였어야 자신들의 진압과 학살이 정당화되고 지배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죽음의 시대, 그렇게 민중은 “굵은 눈물 붉은 피”를 흘려야 했다.

법 제정 후에도 끊임없는 조롱과 폄훼

김영삼 정권 시기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1995년)이 제정됐다. 이를 계기로 학살자 전두환과 노태우는 15년이 지난 그제야 구속됐다. 물론 민중운동진영이 끊임없는 진상규명 투쟁을 벌인 결과다. 그러나 처벌도 잠시, 1997년 12월 20일 대통령 김영삼과 당선자 김대중은 ‘통합’을 이유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했다.

김대중 정권 시기 명예 회복과 보상, 기념사업이 본격화됐다. 2000년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5·18민주화운동 공식 기념식에 참석했다. 2002년 1월 ‘광주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고, 망월동 묘역은 국립묘지로 승격됐다. 노무현은 대통령 시기 매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참여정부는 5․18 광주의 위대한 정신을 계승해 개혁과 통합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이라고 했다. 광주민중항쟁의 위상이 자리잡히는 듯했다.

정권은 다시 바뀌었다. 5·18 국립묘지를 찾은 2004년에는 ‘유영봉안소’에서 활짝 웃고, 2007년에는 홍남순 인권변호사의 묘역 상석을 밟고, 대선 후보 시절 공식 석상에서 세 번이나 5·18을 ‘사태’라고 말했던 이명박도 대통령 취임 첫해에는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국가보훈처는 매년 불러온 ‘임을 위한 행진곡’을 2010년 30주년 행사부터 공식적으로 제외했다. 행정안전부는 전국공무원노조가 광주 순례에 나선다고 하자 ‘불법’이라며 참가자 처벌을 외쳤다. 2013년 국방부가 북한군의 5·18 개입설이 사실무근이라고 공식 발표했음에도 보수성향 단체와 매체의 5․18 왜곡과 폄훼가 계속됐다. 박근혜 정권은 제재하지 않았다. 도리어 5․18의 역사적 의미와 위상을 축소하며 왜곡을 부추겼다.

문재인 정권이 출범한 2017년, 기념식에서 9년 만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졌다. 2018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돼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비로소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조사 활동을 시작했다.

한편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전두환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2018년 시작된 1심 판사는 현재 국민의힘 대표 장동혁이었다. 그는 ‘고령’과 ‘거동 불편’을 이유로 전두환이 신청한 불출석 허가를 받아들였다. 거동이 불편한 전두환은 골프장에서 지인들과 라운딩을 즐겼고 12월 12일에는 군사 반란 가담자들과 서울 강남의 고급 음식점에서 샥스핀이 포함된 1인당 20만 원 상당의 코스요리와 와인으로 12.12 내란을 기념했다. 분노한 국민은 전두환을 강제 구인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장동혁은 받아들이지 않더니 2020년 1월 총선 출마를 위해 판사를 그만두고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이후 1심(2020년 11월)은 군의 헬기 사격을 인정했으나, 항소심 진행 중 전두환이 사망해 버렸다.

법원도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한 출판물이 허위 사실임을 명확히 판시했다. 2002년부터 “5·18은 북한 특수부대가 주도한 폭동”이라는 주장을 들고나와 책까지 펴낸 지만원에 대한 명예 훼손 혐의는 2023년 1월, 5·18 관련 단체에 대한 손해배상은 2026년 1월에 각각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국회에서 민중항쟁을 왜곡해도 괜찮은 나라

그리고 2026년 8월 13일, ‘대한민국 국회의원’ 이진숙이 국회에서 이른바 ‘5.18 민주화운동의 재조명 국회공개포럼’을 열었다. 부제는 ‘모두의 역사,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학술적 성찰’이다. 5·18 특별법에 따라 5·18을 허위 사실로 왜곡·폄훼하면 5년 이하 징역형에 처할 수 있지만 예술·학술, 연구, 보도 등 공익적 목적의 행위는 처벌 대상에서 제외된다. 토론회 제목에 ‘학술’이라는 단어를 넣은 이유일 게다.

이진숙과 함께 토론회를 공동 주최한 새역사국민운동의 공동대표 이영훈은 인사말에서 “광주에서 있었던 10일간의 ‘소요 사태’”라고 표현했다. 주동식(국민의힘)은 “대한민국의 정통 주인은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맥락”이라며 “5·18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되느냐. (…) 대외적으로 고립시키고 내부적으로는 분열시켜야 한다”고 했다. 온라인매체 기자 김용삼은 전두환이 ‘살인마’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국회가 이 지경이니 기업(스타벅스코리아)은 상술로 5·18을 모욕하고, 고등학교 야구선수들은 그걸 따라 하며 광주에서 온 또래 선수들을 조롱할 수 있었다. 이진숙은 광주제일고 야구선수들을 조롱한 배제고에 응원 화환을 보낸 바 있다.

4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라인상에서 “5·18은 폭동”, “북한군이 개입했다” 등의 허위 주장과 비하 표현은 반복되고 있다. 5·18기념재단이 인공지능(AI) 기반 온라인 모니터링을 벌인 결과 2025년 2월부터 11월까지 포착한 5·18 왜곡·폄훼 게시글·댓글·영상은 총 5,182건이었다. 전년도 같은 기간 1,728건보다 크게 늘었다. 파급력이 큰 유튜브 왜곡 콘텐츠는 같은 기간 34건에서 217건으로 급증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5·18 특별법 처벌 조항 신설 이후인 2021년부터 올해 4월까지 피의자로 입건된 사람은 120명, 이 중에서도 혐의가 인정돼 검찰에 송치된 인원은 67명뿐이라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원수를 무슨 수로 갚는다냐!”

오월이 오면, 아니 지금 팔월에도 “우리 가슴에는 붉은 피”가 솟는다. 정권 따라 평가와 위상이 달라지고, 지배계급과 정치세력은 조롱하고 폄훼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국가가 가해자다. 국회는 가해를 이어가도 괜찮다. 그러면 국민은 무슨 수로 원수를 갚을까.

“나중에 느이 작은형이 그러드마는. 총을 맞고 피를 너무 흘려서 네 얼굴이 그리 희었다고. 그래서 관이 가벼웠다고. 네가 아무리 덜 컸다고 해도, 그렇게 관이 가벼울 수는 없었다고. 그람스로 두 눈에 핏발이 서드라이. 이 원수는 내가 갚을랍니다. 그것이 뭔 소리다냐. 깜작 놀라서 내가 그랬다이. 나라에서 죽인 동생 원수를 무슨 수로 갚는다냐. 너까장 잘못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이다. 그라고 삼십년이 흘러가도록, 너하고 느이 아부지 기일에 그 자석이 가만히 서서 입 다물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이상해야. 네가 죽은 것이 저 때문이 아닌디. 왜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어깨가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을까이. 저것이 아직도 원수 갚을 생각을 하고 있단가, 생각하면 가슴이 내려앉아야.” (한강, 『소년이 온다』 181~182쪽, 창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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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대 남성이 지난 5월에 지면을 그대로 흉내 내 제작·유포한 5·18 왜곡 폄훼 게시물.

13/08/2026
AI가 철도노조 아카이브를 다운시킨다김병구(철도노조 80년사 편찬위원)퇴직 후 무던히도 돌아다닌다. 천년의 길 산티아고 길을 시작으로 서유럽을 종단하고, 실크로드로 천산산맥을 넘어 천산북로와 남로를 이어 걷는다. 오...
11/08/2026

AI가 철도노조 아카이브를 다운시킨다

김병구(철도노조 80년사 편찬위원)

퇴직 후 무던히도 돌아다닌다. 천년의 길 산티아고 길을 시작으로 서유럽을 종단하고, 실크로드로 천산산맥을 넘어 천산북로와 남로를 이어 걷는다. 오렌지색 푸르공으로 몽골의 사막과 초원을 달리고, 국경을 넘어 바이칼호 거쳐 하바롭스크, 연해주까지 내려간다. 뚜렷한 이유나 목적 없이 그냥 걷고 싶어서 다닌 1년간의 여정이다. 한 갑자를 살았지만 삶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난 ‘길 없는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아주 익숙한 것을 보게 된다.

1937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17만 명의 나라 잃은 민족이 있다. 중앙아시아의 혹독한 추위를 서로의 몸을 포개어 살아남은 그들은 고려인이라 불린다. 이제는 50만이 넘고 그중 일부가 90년대 초에 연해주로 돌아온다. 우수리스크의 고려인들은 그 험한 세월을 잊지 않기 위해 기념관을 만든다. 그곳에서 그들의 진정성을 만난다. 작은 공간이지만 살아온 세월에 대한 자긍심과 애절함이 절절하다. 죽비로 얻어맞은 듯 무언가를 각성하게 된다.

20년 전부터 철도현장에서 자료를 모으고 노조 사업으로 자료전산화작업을 시작한다. 전자도서관도 만든다. ‘철도노조 60년사 편찬위원회’가 구성됐지만, 이명박 정부의 극심한 노조탄압으로 사업은 중단된다. 어렵게 만든 전자도서관도 유명무실해진다. 다행히 2024년 4월 철도노조 최명호 집행부에서 아카이브 구축을 포함한 80년사 편찬사업을 추진해 이제 마무리 단계다. 당위로 진행한 사업이지만 성과에 대해서는 늘 회의적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서버 용량이 충분하다고 생각한 아카이브가 자꾸 다운된다. 서버가 다운될 정도의 폭풍 검색이 일어나고 있다. 대박이다. 그 범인은 사람이 아니고 AI이다. AI는 엄청난 속도로 철도노조 아카이브를 검색해 의뢰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철도노조 역사편찬사업은 이미 AI시대에 맞춤한 미래사업이 되었고, 생존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업그레이드를 해야 한다. AI는 필연적으로 정보 및 데이터베이스 전쟁을 전제로 한다. 이제 데이터베이스 구축은 일부 연구자들의 관심사를 넘어서서 노동자 선전과 이데올로기 투쟁 전선에서 핵심적인 사업이 되었다.

‘노동자역사 한내’에서는 총력을 기울여 그동안 수집한 어마어마한 양의 자료를 전산화하고 있다. AI시대에 노동자 사상투쟁을 선도하고 있는 한내의 진정성은 대단하다.

그러나 어렵게 구축한 철도노조 아카이브와 한내 아카이브의 미래는 밝지 않다. 이미 구축된 초보적 단계의 철도노조 아카이브는 이후 사업계획이 없어서 유지 및 확장이 쉽지 않을 듯하다. 두 노총을 비롯한 대부분의 노동조합과 노동단체들은 AI시대의 이데올로기 전쟁에 관심이 없다. 회원들의 회비와 후원금, 프로젝트 등으로 유지해 온 ‘노동자역사 한내’도 이제 한계에 봉착한 듯하다. 각종 자료와 노동박물관 설립을 위한 박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고양시 설문동의 건물을 유지하기에는 누적적자가 너무 크다. 한내도 생존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AI시대의 노동자에게는 좀 더 개방적이고 체계적이며 글로벌한 보물창고가 필요하다. 각종 노동관련 아카이브를 연계하고 집적하여 모두가 생산자이면서 소비자가 되는 놀이터가 필요하다. 그곳에서 신나게 놀다 보면 AI는 노동자의 친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놀이터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곧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그 투쟁의 중심에는 20년 동안 묵묵히 일해 온 ‘한내’가 있다. 기로에 선 ‘한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죽비로 맞기 전에 각성하는 게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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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철도노조 아카이브(archive.krwu.or.kr) 화면 캡쳐

[역사로 보는 오늘] ‘기후재난 생존휴가’가 필요한 때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산업혁명과 함께 휴식, 휴가 개념이 바뀌었다. 농번기 농한기처럼 자연의 이치에 맡기던 휴가 대신 공장 생산 흐름에 따르는 휴가가...
28/07/2026

[역사로 보는 오늘] ‘기후재난 생존휴가’가 필요한 때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산업혁명과 함께 휴식, 휴가 개념이 바뀌었다. 농번기 농한기처럼 자연의 이치에 맡기던 휴가 대신 공장 생산 흐름에 따르는 휴가가 자리 잡았다. 노동과 휴식의 확실한 구분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다.
휴가를 둘러싼 투쟁이 격화되었다.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결성해 노동시간 줄이기 투쟁을 전개했고 8시간 노동, 나아가 유급휴가를 쟁취했다.
1936년 프랑스에서 법으로 유급휴가를 보장하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어 날씨가 좋은 여름에 ‘휴가를 즐기는 문화’가 등장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곳곳으로 확산했다.

노동 효율과 에너지절약을 위해 시작된 한국 노동자의 여름휴가

1960년대 한국의 섬유공장은 24시간 돌아갔고 노동자들은 1일 12시간 노동했다. 근로기준법에는 1일 8시간, 주48시간 노동을 기준으로 정하고 당사자 합의로 60시간 한도로 근로할 수 있다는 예외 규정을 두고 있던 때였다. 노동보호 입법의 취지는 노동시간 제한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선진국에서 한국의 노동력을 수입하겠다는 보도나 신문광고가 날 때마다 많은 이들의 가슴이 설렐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짧은 노동시간, 좋은 후생시설, 여름휴가 보장은 노동자를 혹하게 하는 요소였다. 이미 “프랑스에서는 7, 8월이면 구두닦이들도 ‘휴가 중’이라는 팻말을 걸어놓고 피서지로 간다”며 ‘바캉스’를 소개하고 있던 터라 더 그랬다.
1970년대 근로기준법 제48조는 “1년 개근한 근로자에 대하여 8일, 9할 이상 출근한 자에 대하여는 3일의 유급휴가를 주어야 한다”, “2년 이상 계속 근로한 근로자에 대하여는 1년을 초과하는 계속근로연수 1년에 대하여 전항의 휴가에 1일을 가산한 유급휴가를 주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부 국영기업과 금융업계를 제외하면 법적으로 보장된 유급휴가를 누릴 수 있는 노동자는 없었다.
노동청은 하계휴가 지침을 매년 냈고 해를 거듭할수록 강화했다. 휴가를 주지 않거나 휴가를 무급으로 하거나 휴가 대신 돈으로 지급하는 것을 단속한다고 지침을 내렸다. “여름철 30도 이상의 무더위가 계속되면 초조, 권태, 주의력감퇴 등 지나친 피로를 일으켜 생산성이 오히려 낮아지고 있기 때문에 산업재해가 연중 가장 많이 발생한다”고 지적하며 사업주의 각성을 촉구했다(경향신문 1977.6.28). 정밀근로감독까지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기업주들은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
여름휴가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다. 1985년부터는 여름 동시 휴가 기업이 확 늘어났다. “정부가 에너지절약 시책의 일환으로 7월 15일부터 8월 31일까지 회사 전체가 쉬는 경우 기본요금에서 30%까지 할인해주는 ‘전력요금 할인제’를 실시”함에 따른 것이다. 이 해 전국 938개 업체, 서울 112개 업체가 여름휴가를 실시했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1만여 명, 조선공사부산조선소 5천여 명이 일제히 휴가를 갔다. 태평양화학, 대한중기, 아남산업, 원풍모방 등에서도 동시 휴가가 실시됐다. 구로공단에서는 385개 업체 중 70% 이상이 7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휴업했다(매일경제 1985.7.26). ‘라인’을 세우고 일제히 휴업하면서 ‘7말 8초’ 여름휴가가 퍼져갔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단체협약으로 유급휴가 확보

1987년 7, 8, 9월 노동자대투쟁 당시 노동자들은 어용노조 퇴진, 임금인상을 주 요구로 외쳤다. 여기에 “여름휴가비로 급료의 100%를 지급하라”고 요구하는 사업장이 많았다. 노동자에게 온전한 휴가는 업무로부터 자유롭고 임금이 보전되는 휴가였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노조는 1987년 11월 임단협을 시작해 다음 해 2월 조인했는데, 휴식과 휴가가 쟁점이었다. 심야 휴게시간과 연장 휴게시간을 10분에서 15분으로 연장키로 했다. 휴일은 법정공휴일, 노조 창립일, 하기휴가 4일을 유급휴가로 합의했다.
서울지하철노조는 1987년 10월 특별휴가 1일, 1988년 말 특별휴가 2일을 쟁취했다. “입사 이래 처음으로 ‘휴가’라는 것을 받은 노동자들은 이 귀한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서울지하철노동조합 30년사』, 한내, 2017) 이후 노조는 인력 확충을 통한 휴가 확보, 하계 휴양지 확보 등으로 확장해갔다.

모든 노동자에게 ‘생존’을 위한 여름휴가를

노동현장에 여름휴가는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생계를 위협받지 않는 휴가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특수고용노동자는 사회보험의 산재휴업 및 휴업급여, 출산전후급여 정도를 쉴 수 있는 권리로 보장받고 있다.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누릴 수 있는 휴가는 휴가가 아니다. 기온이 체온보다 높고 비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져도 일해야 하는 노동자가 그래서 있다. 밭에서 일하다 쓰러지고 배달하다 목숨을 위협받아도 쉴 수 없는 노동자가 그래서 있다.
역사적으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주체로 단체교섭, 사회적 협약을 통해 시간에 대한 통제력을 높여왔다. 기후재난 시기 모든 노동자에게 국가 책임 아래 생존을 위한 재난 휴가를 보장하라 요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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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노동과 세계]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가 1일 폭염감시단을 발족했다.

고(故) 이승원 동지의 평전 작업을 시작합니다평범한 노동자에서 열정적인 노동운동가로 변모해 간 그의 삶을 기록해 두고자 합니다이 작업은 누군가의 남편이었고, 아버지였고, 친구였고, 동료였던 이승원의 생애를 보다 분명...
21/07/2026

고(故) 이승원 동지의 평전 작업을 시작합니다

평범한 노동자에서 열정적인 노동운동가로 변모해 간 그의 삶을 기록해 두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누군가의 남편이었고, 아버지였고, 친구였고, 동료였던 이승원의 생애를 보다 분명하게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더불어 그의 생애를 통해 좁게는 노동자역사 운동, 넒게는 전체사회 운동의 한 궤적을 살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승원 평전은 2027년 7월 10주기에 맞춰 출판하고자 합니다

애도하는 일은 기억하는 일이고,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그의 생각과 삶에 대화를 시도해보는 일입니다

이승원을 기억하는 모든 이들도 이맘때쯤이면 그와 나눴던 대화의 한 장면쯤을 떠올리고 있을 테지요

지독하게 무더운 여름이었고, 이후로 또 아홉 해나 지난 여름이지만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만이 아쉽고 그립습니다

고(故) 이승원을 기억합니다

- 노동자역사 한내

[와글와글] 나는 택시기'사람'입니다정용재(노동자역사 한내 운영위원)1984년 5월 25일“택시노동자들은 일당식 도급제, 사납금제로 극심한 착취에 시달려 왔다. 전근대적 임금제도는 합승과 승차 거부, 과속과 난폭 운...
15/07/2026

[와글와글] 나는 택시기'사람'입니다

정용재(노동자역사 한내 운영위원)

1984년 5월 25일

“택시노동자들은 일당식 도급제, 사납금제로 극심한 착취에 시달려 왔다. 전근대적 임금제도는 합승과 승차 거부, 과속과 난폭 운전, 교통법규 위반을 유발했다. 16시간 또는 24시간 연속운전을 강요하는 격일제 근무로 교통사고와 직업병 위험에 시달렸다. 이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와 1984년 5~6월 사납금 인하, 부제 완화, 노조결성 방해 중지, LPG 자유 급유 등을 요구하며 전국에서 지역연대파업을 전개했다. 1984년 5월 25일부터 6월 4일까지 전국에서 택시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이어갔다. 이 투쟁은 1984년 전국적인 노동운동 활성화의 기점이 됐다.” ― 김태연, ‘변혁의 기치 들고 반격에 나선 한국 노동자계급’ 131쪽, 『한국노동운동사』 1권, 한내, 2026

2026년 3월 29일

택시노동자 고영기가 택시월급제 즉각 시행과 택시발전법 개악 중단을 요구하며 국회 국토교통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맹성규 의원 지역사무실 앞 20미터 높이의 교통탑에 올라 자신의 몸을 하늘감옥에 가두었다. 2019년 택시발전법이 제정됐으나 7년의 유예 끝에 올해 전면 시행이 예정된 택시월급제를 또다시 2년 유예한다는 개악 법안을 막기 위해서였다.

42년이 지난, 아니 일제강점기 때부터 도입된 불법 사납금제는 지금도 기준금제도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택시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다. 이에 항거한 택시 노동열사가 수십 명이고 방영환 열사의 분신 사망도 불과 3년 전의 일이다. 2017년 택시노동자 김재주의 510일 고공농성 등 그야말로 목숨값으로 쟁취한 택시월급제(전액관리제)의 혜택을, 택시노동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구 하나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하루 열 시간을 일하고도 제 돈을 냈습니다

사납금제도는 법인택시 기사가 하루 동안 운행하여 올린 수입 중 회사가 정한 일정한 금액을 회사에 납부하고, 남은 금액을 자신의 수익으로 가져가는 방식이다. 택시노동자는 사납금을 넘겨야만 소득이 발생하기 때문에, 장시간 운전, 승차 거부, 난폭운전 등 각종 부작용이 끊이지 않았다. 택시사업의 고질적 병폐인 사납금제 폐지와 운송 수입금 전액을 회사에 납부하는 '전액관리제' 도입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 마침내 2020년 1월부로 법인택시의 사납금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택시운송수입금 전액관리제'가 의무화됐다.

그러나 불법과 탈법의 행태는 기준금제도라는 변종 사납금제도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오히려 실질 소득은 줄고 장시간 노동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현재 택시노동자는 노사 합의로 소정근로시간을 정할 수 있도록 하는 '간주근로시간제'로 일하고 있다. 택시회사들은 이 제도를 악용해 소정근로시간을 실제 노동시간보다 훨씬 낮게 잡는다. 하루 10시간을 일해도 실제로 임금이 인정되는 노동시간은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치는 3~4시간에 불과하다. 공짜 노동과 임금 착취의 악순환 속에 최저시급도 손에 쥐어지지 않는 노동자들은 장시간 운전에 내몰리고, 일상이 된 과로와 위험운전은 결국 사고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의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에 따른 실질적인 임금 구조 개선과 보장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이다. 처참한 죽음의 소식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다.

일한 만큼 임금을 지급하라

택시노동자들은 당장 개악 법안 철회가 어렵다면 근로기준법 시행령을 바꿔서라도 택시노동자들의 적정 임금을 보장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미 카카오택시 등 호출앱을 통한 택시 이용은 일상화됐으며 운송 수입은 그 어느 때보다도 투명하게 확인되며 관리와 적정 임금 분배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 사업장 밖에서 일하는 택시노동자의 노동 시간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근로기준법 제58조 간주근로시간제를 적용했지만, 현재는 TIMS(택시운행 기록장치), 카드 결제 기록, 배차 기록과 호출 기록, GPS 위치 정보 등으로 초 단위 노동시간 산정이 가능해 택시업종은 적용 대상이 될 이유가 없다. 택시업종에서 간주근로시간제는 노동시간 산정의 편의를 위한 제도가 아니라 택시노동자의 공짜 노동과 과로를 조장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시행령은 그야말로 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다. 고공농성 초기 청와대와 고용노동부는 시행령 개정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했으나 결국 고용노동부는 경사노위에서 논의가 필요하다고 그 책임을 넘기고 말았다.

어떤 세상에 첫발을 디디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고영기 동지가 몸을 뉜 20미터 높이의 교통탑 농성장은 고작 0.4평, 가운데 봉과 옆 계단 때문에 실제로 쓸 수 있는 공간은 불과 0.25평이다. 이 좁은 공간에 몸을 욱여넣고 지낸 지 오늘(7월 15일)로 109일째다. 연일 반복되는 폭염과 폭우에 땅 아래의 농성장 동료들과 연대자들은 오늘도 마음이 무겁고 시시각각 전전긍긍한다.

고영기는 농성 100일을 맞이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100일을 버틴 것이 아닙니다. 통신탑 위에서도 하루는 계속 흘러갑니다. 혈압을 재고, 약을 먹고, SNS로 투쟁을 알리고,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편지를 씁니다. 먹고 자고 비를 견디고 폭염을 견디는 일상. 100일은 특별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낸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가장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합니다. 또 택시지부야, 또 고공농성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라는 걸 압니다. 반복되는 투쟁, 반복되는 연대 요청, 그래서 저는 연대해 주시는 동지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마음은 고마움입니다. 통신탑 위에는 저 혼자 있지만, 이 싸움은 혼자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매주 찾아와 주시는 동지들, 현장을 지키는 조합원들, 멀리서도 마음을 보태주시는 분들. 그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제가 100일을 버틴 것이 아니라, 동지들이 저를 100일 동안 버티게 해주었습니다. 어떤 세상에 첫발을 디디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저는 월급제가 시행되는 세상에 첫발을 디디고 싶습니다. 10시간을 일하고도 내 돈으로 사납금을 내야 했던 세상이 아니라, 일한 만큼 정당하게 월급 받는 세상, 손님을 돈이 아니라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세상. 그리고 통신탑에서 내려온 그날, 함께 버틴 동지들과 웃으며 소주 한잔할 수 있는 세상. 더 이상 누구도 우리처럼 같은 싸움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저는 그런 세상으로 내려가고 싶습니다. 그 세상을 위해 저는 통신탑에 올랐습니다."

택시회사 무지개운수와 택시기사 김도기가 "정의가 실종된 사회, 전화 한 통이면 오케이"를 외치며 불의에 짓밟힌 피해자들을 대신해 복수를 대행하는 드라마 '모범택시'는 아이러니하게도 온갖 탈법과 부조리로 점철된 자신들의 택시 현장에는 침묵한다. 대신 현실의 고영기와 동료들은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이 통하지 않는 택시 현장을 바꾸기 위해, 택시노동자와 이용자 시민의 피해와 희생을 바탕으로 택시 자본가만 이익을 취하는 착취 구조를 깨기 위해 오늘도 하늘에서, 땅에서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이 투쟁이 반드시 이기고 또 이길 때까지 연대해야 할 이유이다.

[인용]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나는 택시기'사람'입니다』 연작 홍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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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대구택시운전자 집단시위 65명 연행 9명 구속키로”(동아일보, 1984.5.26)

[문학이 목격한 사회] 데미안, 멈추지 않는 마음 속의 질문왕의조(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헤르만 헤세는 1877년 독일에서 태어나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선교사이자 신학자였던 그의 부모는 그를 신학교에 보냈...
07/07/2026

[문학이 목격한 사회] 데미안, 멈추지 않는 마음 속의 질문

왕의조(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헤르만 헤세는 1877년 독일에서 태어나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선교사이자 신학자였던 그의 부모는 그를 신학교에 보냈지만, 이는 그로 하여금 극심한 우울증을 겪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후 헤세는 시계 공장과 서점에서 일하며 혼자 문학을 공부하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헤세는 1차 세계대전 등의 사회 혼란과 가족의 불화와 질병 등이 겹치면서 다시 큰 정신적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이 시기 그는 융 학파 심리학자들의 심리치료를 받으며 인간의 무의식과 자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훗날 헤세의 작품에 충실히 반영되었는데, 「데미안」은 이러한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투영한 헤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아직 열한 살도 안 된 아이가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사람들도 더러 있을 줄 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내 일을 이야기하지 않겠다. 인간을 보다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겠다. 자신의 감정들의 한 부분을 생각 속에서 수정하는 법을 익힌 어른은 어린아이에게 나타나는 이런 생각을 잘못 측정하고, 이런 체험들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당시처럼 깊게 체험하고 괴로워했던 때도 드물다.”

어른들은 쉽사리 자신들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오래된 착각에 불과하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규범과 질서를 제시하거나 설득할 뿐이고, 아이들은 그들 중 얼마간을 자신들의 삶에 수용하거나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어른과 아이는 평등하다.

어른과 아이는 성숙과 미성숙 같은 경계로 명확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아이 같은 면모를 아이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어른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오히려 좋은 어른일수록 자신의 내면에 수많은 아이들을 삶 속에서 오랫동안 감각하고 또 발견하면서 살아간다. 내면에서 솟아 나오는 진지한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또 쉽게 결론 내리지도 않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데미안이 ‘청춘의 소설’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유도 이러한 사정에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얼마나 많은 어른들(혹은 사회)이 청춘과 아이를 망각하고 살아가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지금은 안다. 세상에 자기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 인간에게 불편함을 주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데미안의 주인공인 싱클레어는 유복하고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세계는 종교의 세계이며 죄와 구원의 이분적 세계이다. 데미안은 이 세계관을 뒤흔드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싱클레어에게 다가온다. 특히 이 사회가 악당이나 악마라고 여기는 존재들에게는 저마다의 구조적인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며 전복적인 주장을 해오는 것이다. 싱클레어는 이를 통해 ‘자기 안의 정직’에 더 깊이 귀 기울이게 된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사실은 하나의 믿음에 불과하며, 그것이 언제든 전복되거나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외면하기로 결정하고 방황에 탐닉한다. 그리고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며 자신의 청춘과 내면이 그토록 처절하고 고통스러웠던 이유들을 하나둘 파헤쳐 가기 시작한다. 기나긴 방황의 과정에서 자신만의 생각이 정리되었을 때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다시 만난다.

“어느 흑인 부락에 있는 청년 집회소나 여기나 모두 똑같은 게 아닙니까? 한 사람이 말했다. 다 똑같지요. 심지어 타투가 아직도 유행한답니다. 알아두세요. 이게 신유럽입니다. (중략) 그런데 당신네 일본에서도 더 나을 건 없겠죠. 패거리를 뒤쫓지 않는 사람은 어디서나 드물어요. ”

“지금 도처에 만발해 있는 것은 결코 연대가 아니야. 진정한 연대는 개개인들이 서로를 감각함으로써 새롭게 형성될 테고, 한동안 세계의 모습을 바꾸어 놓을 거야. 지금 연대라며 저기 저러고 있는 것은 다만 패거리 짓일 뿐이야. 사람들이 서로에게로 도피하고 있어. 서로가 두렵기 때문이야. (중략)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좋은 문학은 적확한 은유이자 알레고리이다. 소설의 인물은 저마다 분리되어 있지만, 내재적으로는 모두 문학적 논리에 따른 인과를 맺고 있다. 그러니까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작가의 내면과 번민을 인격화한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듯이 말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죄와 구원의 문제에 몰두한다. 이는 서구 문학의 오랜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그리고는 마침내 질서와 가치는 하나의 국면이기에 반드시 와해되는 것이며, 자기 자신만의 소명을 감각하고 생산해내는 일만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누구나 먼 운명을 목표로 삼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개인들에게는 성격에 불과하다. 개인의 성격이 곧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먼 운명이 구체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쯤 인간은 깨닫는다. 단지 나의 사소한 선택들이 이 모든 것을 이루었음을 말이다.

직업이 없어지는 시대가 온다고 한다. 새삼스러운 일이다. 이 사회는 언제나 공장처럼 돌고 있었는데 말이다. 부품처럼 인간을 찍어내려고 드는 사회가 또 하나의 부품을 발명한다고 한들 놀라운 일도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부품처럼 길러진 인간은 기계의 일부이기에 언제든 대체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오히려 고민해야 할 것은 인간임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에 있다. 인간이 죄와 구원을 고민하고 카인과 아벨을 호명하기 시작한 이유는 인간의 정체성을 논증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사회라는 거대한 공장이 이번에는 완전히 인간을 대체하려고 할 때, 그때. 인간이란 무엇일까? 언젠가 외계인이 지구에 등장해서 로봇과 인간에게 누가 인간인지를 증명해보라고 한다면 인간은 어떤 방법을 택할 수 있을까?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전쟁이 터지자 각자 병사와 장교로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그리고 전장 속에서도 서로를 응시하며 질문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전장에 육박하는 내면의 소리. 인류가 멈추지 않는 마음속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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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붉은 바이올린, 라울 뒤피, 1948.

[여기, 우리의 이야기] 산재보험제도의 거대한 개미굴‘의학적 전문성’ 장벽 허물고 당연한 치료권 보장하라이은주(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전문성이라는 비정한 미로, 행정적 ‘개미굴’에 갇힌 노동자현행 산재보험제도의 변화...
30/06/2026

[여기, 우리의 이야기] 산재보험제도의 거대한 개미굴

‘의학적 전문성’ 장벽 허물고 당연한 치료권 보장하라

이은주(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전문성이라는 비정한 미로, 행정적 ‘개미굴’에 갇힌 노동자

현행 산재보험제도의 변화과정과 운영 현실을 마주하면 거대한 개미굴이 연상된다. 그간 정부와 근로복지공단은 ‘신속성’과 ‘공정성’이라는 두 개의 가치 중 늘 공정성이라는 미명 아래 선별과 배제의 잣대를 더욱 엄격화해 왔다. 특히 그 잣대는 언제나 ‘전문성’과 ‘의학적 판단’이라는 무소불위의 칼날을 휘두르며 이루어졌다. 전문의와 의학박사들이 구축해 놓은 난해한 의학 용어와 차갑게 수치화된 데이터 앞에서, 노동자가 평생 일터에서 온몸으로 겪어낸 노동의 역사와 구체적인 고통의 언어는 철저히 부정당한다. “이 질병과 업무의 연관성을 의학적으로 입증하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 서는 순간, 노동자는 자신의 아픔조차 스스로 증명하지 못하는 지독한 무력감을 느끼며 한없이 초라해지고 작아질 뿐이다. 그 엄격한 잣대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 바로 산재보험의 거대한 ‘행정적 개미굴’이다.

이 개미굴은 무엇보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은밀함을 가지고 있다. 겉보기에는 노동자 보호를 위해 가장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판단을 내리겠다는 그럴싸한 명분과 공정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내부로 한 걸음만 들어가면 일반인은 도저히 구조를 알 수 없는 수많은 하부 위원회와 소위원회가 마치 지하 동굴처럼 복잡하게 끝없이 뻗어 있다. 2008년 도입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을 시작으로 질병소위원회, 요양검토회의 등등 이름조차 낯선 기구들이 개미굴의 어두운 통로마다 장벽을 치고 서 있는 형국이다. 공단이 자랑하는 그 정교한 ‘전문성’이란, 실상 약자를 품기 위한 따뜻한 손길이 아니라 철저히 노동자를 골라내고 쳐내기 위해 설계한 세련된 방패일 뿐이다. 동시에 이 굴은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거대한 덫이다. 모래 구덩이에 빠진 곤충을 집어삼키는 ‘개미지옥’처럼, 노동자가 아픈 몸을 이끌고 입증 서류를 쥐어 짜내 발을 들이는 순간, 기다리는 것은 끊임없는 재심사와 심의의 무한 루프다. 전문성과 객관성을 표방하는 이 절차들은 실상 비정한 미로이며, 노동자의 고통과 생계는 파묻히고 행정편의주의만 남게 됨으로써 노동자를 지치게 만들고,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잔인한 과정이 된다.

이 거대한 개미굴 시스템 속에서 몸이 아픈 노동자는 제도의 온전한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저 굴의 체제를 유지하고 가동하기 위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하나의 ‘서류 조각’ 혹은 무력한 ‘개미’처럼 취급될 뿐이다. 역학조사라는 명목으로 몇 달, 위원회 심의 연기로 또 몇 달이 흐르는 동안 시간은 철저히 공단의 편이며 노동자의 적이 된다. 이 어두운 개미굴 안에서 노동자가 매일 마주하는 실존적인 고통과 당장 생계를 위협받는 신음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파묻힌다.

일터에선 골칫거리…공단에선 의심 환자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한민국에서 노동자가 일하다가 몸이 아플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감정은 아픔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한국 사회에서 산재를 신청하겠다는 결심은, 목에 주홍글씨 걸기를 감내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래전 현장 노동자한테서 들었던 이 처절한 말은, 관료주의적 개미굴로 진입하기도 전에 현장에서 이미 노동자의 숨통을 조여오는 잔인한 현실을 폭로한다.
산재를 거부하는 회사 측은 “왜 유독 너만 유별나게 구느냐”며 노동자 개인의 책임이나 나약함으로 몰아붙인다. 앞으로도 이 바닥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면 산재 대신 적당히 돈 몇 푼 쥐여주는 ‘공상’으로 합의하자며 은밀하고도 집요하게 종용한다. 법으로는 산재 은폐를 엄격히 처벌한다고 하지만, 현장의 문법은 여전히 법보다 멀고 가혹하다. 결국 생계와 고용 불안이라는 현실에 발목이 잡힌 노동자는 일터에서는 ‘유별난 골칫거리’로, 행정 기구 앞에서는 ‘부정수급을 꾀하는 의심 환자’ 혹은 ‘상병이 없는데 치료받으려는 가짜 환자’로 전락하는 주홍글씨를 목에 건 채 개미굴 앞을 서성이게 되는 것이다.

산재보험을 운영하는 주체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기본적으로 ‘노동자에 대한 불신’이 짙게 깔려 있다. 1964년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된 사회보험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산재보험은 발전의 역사 내내 노동자를 따뜻하게 보호하는 울타리가 아니라 기금을 방어하고 통제하는 문지기 역할을 자처해 왔다. 공단이 휘두르는 의학적 잣대의 부조리함은 수치로도 명백히 증명된다. 근로복지공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기준 공단의 행정소송 패소율은 23%로, 5년 전(13.1%)보다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 주목할 점은 소송의 패소 원인이다. 사실관계의 차이가 아니라 ‘상당인과관계’를 판단하는 법령 해석의 차이가 무려 50.2%로 절반을 넘었다. 공단 스스로도 “공단은 의학적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업무 관련성을 판단하는 반면, 법원은 규범적·종합적으로 판단한다”고 인정했다. 법원은 이미 사회통념에 기초한 ‘규범적 판단’을 확립해 놓았음에도, 공단은 닫힌 의학 자문의 틀에 갇혀 노동자를 사지로 몰아넣고 있었음을 자백한 꼴이다.

그럼에도 최근 정부는 또다시 의사 중심의 ‘업무상질병의학자문위원회’를 신설하겠다는 시행령 개정안을 내놓았다가 많은 비판과 우려로 일단 철회했다. 업무와 재해 간의 인과관계 판단에 규범적 관점을 명문화하겠다는 국정과제는 온데간데없고, 대안적 방안으로서 실효성 있는 당연한 치료권을 검토하지 않은 채 법률가나 노동자 측의 참여를 철저히 배제하면서, 오직 ‘의학적 입증’의 잣대만 더 굳건히 세우려 하고 있다. “의학적으로 증명된 것만 인정하겠다”는 닫힌 사고는 규범적 책임을 회피할 또 하나의 교묘한 퇴로이자, 거대한 개미굴 위에 옥상옥을 얹는 기만일 뿐이다.

산재보험이 존재하는 진짜 이유는 어디로 갔는가. 일하다 병든 노동자가 생계 걱정 없이 조속히 치료받고, 무사히 일터로 복귀하도록 돕는 것이 이 제도의 유일한 존재 이유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특히 반도체·전자산업처럼 수백 종의 화학물질이 복합적으로 사용되는 첨단 사업장에서, ‘불확실한 위험’의 영역은 나날이 넓어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발암 요인인 ‘흡연’조차 특정 암과의 인과관계를 의학적으로 명백히 밝히는 데 수십 년이 걸렸는데, 국내 유통 화학물질의 대부분이 발암성 정보조차 없는 현실 속에서 노동자에게 의학적 완벽성을 증명해 오라는 것은 애초에 산재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몸이 아픈 노동자가 생계를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일터로 나가거나,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에 이르는 현실은 이 제도의 파산을 의미한다.

이뿐 아니라 농림어업의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여전히 산재보험 적용이 제외돼 있다. 게다가 시대가 변하고 노동의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 특수고용직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노동자들이 일터를 채우고 있지만, 산재보험의 시계는 여전히 과거의 기준에서 멈추어 있는 형국이다. 이들은 똑같이 일하다 다치고 병들어도 자신이 ‘노동자’임을 증명하는 서류 한 장을 갖추지 못해 개미굴 입구에서조차 쫓겨난다. 사각지대에 방치된 이들에게 산재보험은 실재하지 않는 신기루일 뿐이다. 위험의 외주화를 넘어 ‘위험의 무권리화’ 판치는 현실 속에서, 산재보험은 가장 취약한 노동자들을 고의로 누락시키며 그늘을 넓혀가고 있다.

‘위험의 무권리화’를 넘어, 노동자의 따뜻한 ‘방패’로

플랫폼·특수고용직 노동자가 서류 미비로 배제되지 않도록, 형식적 근로계약서 유무가 아닌 ‘실질적 종속성 및 소득 의존도’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플랫폼 기업이 산재보험료를 의무 분담하도록 시스템을 개조할 때, 비로소 ‘위험의 무권리화’를 막을 수 있다.

산재보험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의 전면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국민이 아프면 어느 병원에 가든 치료비의 일부만 내고 당연히 치료부터 받듯이, 일하다 다치고 병든 노동자 역시 고용의 형태나 계약서 유무와 상관없이 ‘당연한 치료권’이 최우선으로 보장받아야 한다. 산재의 문턱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처리 절차를 대폭 간소화해야 한다. 국가가 먼저 치료를 보장하고 노동자의 생계를 안정시킨 뒤, 까다로운 상병 심사와 인과관계 규명은 입증 역량을 가진 국가와 위험의 원인을 제공한 기업 간의 책임 공방으로 재구조화하는 것, 그것이 사회보험이 져야 할 마땅한 사회적 책임이다.

제도 개선의 방향은 의학의 잣대로 판단의 공간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구체적인 삶을 품는 규범적 공간을 넓히는 방향이어야 한다. 겹겹이 파헤쳐진 행정의 개미굴을 메우고 통제의 장벽을 허물 때, 비로소 일터에서 다친 노동자들이 목에 걸린 잔인한 ‘주홍글씨’를 벗어던지고 온전히 회복에만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보면, 파괴된 몸으로 일터의 유해성을 증명하는 증표가 되어야 했던 노동자가 다시 병든 몸을 이끌고 불의에 저항하며 싸워온 그 투쟁의 역사야말로 이 비정한 산재보험이 그나마 제 기능을 하도록 밀어붙인 서글픈 동력이었다.

법과 제도는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한 고정물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이자 기울어지기 쉬운 ‘저울’에 가깝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권력과 관료주의라는 중력에 이끌려 기득권을 이롭게 하는 통제의 도구로 흘러가 버리지만, 끊임없이 감시하고, 질문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채워 넣을 때 비로소 사회를 이롭게 하는 약자의 방패로 바뀐다. 산재보험제도라는 거대한 관료제의 개미굴을 무너뜨리고, 노동자의 방패를 벼리는 실천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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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산재보험 개악 대응 함께] 2024년 6월 산재보험 60주년 노동안전보건운동단체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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