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역사 한내

노동자역사 한내 를 통해 한 시대 노동운동의 역사를 지켜낸 김종배 동지의 유지를 계승하고

노동운동가 김종배 추모사업회는 를 통해 사라질 뻔했던 한 시대 노동운동의 역사를 지켜낸 김종배 동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노동운동 역사자료실을 만들어 노동운동 자료를 수집 보관해 왔습니다. 2007년 추모사업의 차원을 넘어 노동운동진영 전체의 사업으로 발전시키고자 노동자역사 한내를 설립하고 열사정신계승으로 주요하게는 노동운동역사자료실 운영을 통해 노동자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미래의 건강한 노동자 주체의 양성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한국노동운동사』 책담회 전노협이 결의한 노동운동사 30년 만에 발간노동자역사 한내가 2026년 5월 13일 민주노총 교육장에서 『한국노동운동사』 책담회를 열었다.양규헌 한내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전노협이 해산할 ...
19/05/2026

『한국노동운동사』 책담회


전노협이 결의한 노동운동사 30년 만에 발간

노동자역사 한내가 2026년 5월 13일 민주노총 교육장에서 『한국노동운동사』 책담회를 열었다.
양규헌 한내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전노협이 해산할 당시 백서와 운동사를 내자고 결의했고 노동자역사 한내가 산별노조, 단위노조, 투쟁 현장의 역사를 정리해왔지만, 운동사 발간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었는데 30년이 지나 그 일을 해냈다”며 “다만 이것은 시작일 뿐 변혁적 노동운동, 평등사회 건설을 내걸었던 전노협운동이 다시 살아나기를 기대한다”라며 책담회 시작을 알렸다.

“토론·논쟁거리 제공하는 책이자 날카로운 격문”

축사에서 단병호 민주노총 전 위원장은 “발간사, 서문, 목차만 보고도 글쓴이 김태연 동지가 일관되게 추구해왔던 운동의 입장, 견해, 즉 변혁적 노동운동이라는 관점에서 『한국노동운동사』를 편찬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며 “1987년 이후 힘차게 달려온 우리 민주노조운동의 변혁 지향성은 엷어지고 그 자리에 실리적 노동운동이 확장해가고 있는 시점에 역사를 돌아보면서 다시 반추해보는 것은 매우 뜻깊다”라고 의미를 두었다. “상당한 토론과 논쟁거리를 제공하는 책인 만큼 이 책이 누군가의 서고에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일독하고 치열하게 고민해 우리 운동의 자양분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도 축사에 나서 “운동이 고립되고 노동자 정치 존재감이 사라진 이 시대에 저자는 이 방대한 기록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우리가 여전히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근거를 담았을 거라 믿는다. 저자는 학습된 패배주의를 깨야 한다, 거대 담론의 승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승리를 통해서 뭉치면 우리가 해낼 수 있구나, 우리는 그런 집단이구나, 우리는 노동자계급이구나, 그런 내용을 담았을 것이다. 낡은 노선투쟁에 대한 우리 사진을 돌아보는 시간도 적혀 있을 것이다”라며 책에 대한 바람을 드러냈다. 이어 “현시기에 이 책 3권의 마지막 장이 결코 끝은 아닐 것”이라며 “새로운 세대가 써 내려가야 할 서문이자 운동판에 던지는 날카로운 격문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노동운동 전체 포괄하고 평가와 전략 담아내”

저자 김태연과 이야기 손님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저자는 1980년 5월에 한국노동운동의 주요 과제가 제기됐다고 봤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으로부터 임금, 노동시간, 노동안전 등이 기본과제의 하나로 제기됐고, 2천여 명이 모여 노동법 개정 결의대회를 개최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법개정 운동이 또 하나의 기본과제로 제시됐다. 당시 운동 주체들이 정한 과제였다. 여기에 덧붙여 민주적 자주적 노동조합의 전국조직이 있어야 한다, 노동자의 정치조직이 있어야 한다,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실천이 시작됐다. 그것이 3대 대전환 과제였다”고 밝혔다. “이 책은 우리 운동이 지난 시기 이 과제를 어떻게 찾고 만들어가고 실패하고 쟁취하며 왔는지, 어디쯤에 있는지, 못 이룬 것은 무엇인지를 밝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조돈문 사회공공연구소 이사장은 『전노협백서』나 『민주노총 30년사』와 달리 『한국노동운동사』는 노조로 포괄되지 않는 노동운동단체, 활동가들을 담아냈다는 점과 평가가 각 부분에 녹아 있고 마지막에는 전망과 전략을 이야기하며 토론거리와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샀다. 또 “현재 진보진영의 상태가 암울하기도 한데 김태연 동지가 긍정적 톤으로 써 줘서 고맙다. 특히 운동의 한복판에 있던 당사자로서 반성도 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반성할 거리를 던지고 있다. 사회변혁의 중심이었던 민주노동운동이 시민운동에 자리를 내준 상황, 주변화되고 고립화된 상황에 모두가 책임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념적 순수성을 지켜 훌륭하다 자평하면서도 전체 운동으로 볼 때는 왜소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필자의 평가에 동의한다”고 밝혀 운동의 현 상태를 성찰했다. 그러면서도 “이 난관을 헤쳐나갈 방안으로 우리가 연대하고 투쟁할 지점을 찾으신 것 같다. 서로 이질적이지만 힘을 모을 수 있는 공통분모로 사회주의적 가치를 제기했고 동의할 수 있겠다. 기왕 화두를 던졌으니 AI, 기본소득, 정치세력화 등 전망과 전략을 좀 더 고민할 후속 작업까지 슬쩍 제안해보시면 좋겠다”고 덧붙여 이후 토론을 이어가자고 제안했다.

“신자유주의 아래 모든 것이 계급운동”

저자는 IMF 외환위기 시기를 ‘통한의 1998년’이라 표현했다. 그로부터 시작된 비정규 노동운동의 주체인 비정규직이제그만 차헌호(금속노조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지회) 활동가는 “50년 역사에 30년을 차지한 게 비정규 노동운동인데, 그 시작점이 ‘노동운동의 패배’였다는 게 참으로 아프다”고 운을 뗐다. “그때부터 사회적 합의가 시작됐고 놀랍게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 민주노조운동이 가장 휘청거렸다”면서 기간제 2년 허용, 파견제 확대, 복수노조 창구단일화, 탄력근로시간 확대, 최저임금 산입범위 등 반노동정책이 현장에 적용돼 온 현실을 이야기했다. 특히 “문제는 이 상황이 현재도, 올해 노동절에서도 재연됐듯 역사 속 아픔이 여전히 현재 운동에서 반복되고 있다”며 운동의 주체로서 현장투쟁을 강조했다.

미류 체제전환운동 조직위원회 상임활동가는 “책에 인권운동이 연대운동을 주도하게 됐다는 표현이 있던데, 희망버스, 세월호 투쟁 인권운동이 더 진전하게 된 시기가 있었던 것은 맞다. 이것은 어떤 가능성의 실마리고, 그 가능성은 노동운동이 그 모든 것이 노동운동이라고 선언하고 실천하는 만큼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한국 사회의 변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저자는 여전히 사회적 연대투쟁의 자리가 노동운동으로부터 어디쯤 있는지를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이후 우리 운동이 여기에 답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노동운동이 변혁운동의 한가운데 있었던 것은 억압받는 민중을 대표하는 보편자로서 노동자계급이 계급적 요구를 고민해왔기 때문이다. 이제 기후 위기도 고민하고 신당역 지하철 여성노동자 사망 사건도 계급적 요구로 여겨야 할 때다. 그리하여 3권에서 서술한 운동이 연대투쟁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싸워나가야 하는 ‘노동운동사 자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었다”라며 노동자계급운동을 주문했다. 아울러 “변혁을 지향하는 운동 세력이 왜 대중투쟁의 힘을 만드는 데 실패했는지를 더 평가해야 한다, 그 평가를 같이하는 것이 이후 역사를 써가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현장투쟁 기반으로 운동의 전망 만들어가자”

저자는 “노동자역사 한내로부터 요청받기도 했지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 집필을 시작해 4년이 지났다”며 그 시기 글을 쓰지 못하던 때도 있었노라고 고백했다. 저자는 “특히 2002년, 2003년 발전 파업 후 시기를 서술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며 “나도 책임 당사자였던 4.2 총파업 철회는 IMF 외환위기 후 정리해고로 고통받으며 투쟁해온 현장을 살릴 기회를 무너뜨렸다는 점, 이후 대중투쟁이 실종에 가깝게 힘을 잃었다는 점, 사회적 교섭에 매달리는 민주노총 집행부가 계속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고 반성했다.

책담회와 함께 자본의 세상에 맞선 민주노조, 노동자정당, 현장조직, 사회운동조직과 활동가들의 승리와 패배, 진군과 후퇴를 가감없이 남긴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이 ‘정파’를 떠나 매 시기 투쟁에 나섰던 이들의 깊이 있는 고민과 성찰을 불러올 수 있다면 운동의 전망은 밝을 것이다. 현장과 지역 곳곳에서 토론회가 열리고 공부 모임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책 속 주요 투쟁에 함께해 온 저자는 언제든 누구에게든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날 책담회에서 3권 6부로 구성된 책의 핵심 대목을 박성희, 나영선, 유흥희, 이백윤, 강철, 박경득 동지가 낭독했다. 이어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 책을 쓰면서 일관되게 유지한 관점을 적은 서문의 한 단락을 참가자 60여 명이 함께 읽으며 책담회를 마무리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노동자계급의 투쟁 중심은 현장이었다. 이는 ‘현장을 중시해야 한다’라는 원칙론적 언사가 아니다. 노동현장 곳곳에서 치열한 투쟁이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노동조합 상급조직과 정당조직이 흔들리고 후퇴할 때도 노동현장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든 현장조직이든 조직을 만들어 자본과 정권에 맞섰다. 한국노동운동사의 출발점은 현장투쟁이다.”

[텔레그램] https://t.me/+JRyXRFcgs8MxOTE1
[홈페이지] https://www.hannae.org/bbs/board.php?bo_table=newsletter&wr_id=158

[함께 읽는 책] 한국노동운동사 - 멈추지 않는 노동해방의 여정 왕의조(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한국노동운동사의 주요 장면들에는 반드시 노동해방의 구호와 깃발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볼드모트’와도 같은 말이 티브이나...
14/05/2026

[함께 읽는 책] 한국노동운동사 - 멈추지 않는 노동해방의 여정

왕의조(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한국노동운동사의 주요 장면들에는 반드시 노동해방의 구호와 깃발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볼드모트’와도 같은 말이 티브이나 신문을 비롯한 대중매체에 등장한 적은 잘 없다.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외쳤던 그 단어를 이제는 쉽사리 찾아볼 수조차 없다니 말이다. 어쩌면 그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목표가 없는 배는 배가 아니라 부표에 불과하다. 부표는 퇴행하거나 표류한다. 노동해방의 목표는 폐기된 것일까. 찬란했던 그 깃발은 이제 내려진 것일까.

“청계피복, 원풍모방 등 1970년대의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한 대중운동은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노동운동의 방향을 재정립하고자 했다. (중략) 광주민중항쟁 후 신군부는 노동법을 개악해 인민의 노동3권을 완전히 박탈했다. 따라서 노동권의 쟁취는 항쟁 이후 전체 인민의 가장 절박한 요구이자 동시에 한국노동운동의 기본과제가 되었다.”

“민주노총은 위력적인 총파업을 전개했으나, 신자유주의 공세를 지연시켰을 뿐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민주노총이 노개위 참가를 통해 거머쥐었던 정리해고제 법제화는 양날의 칼이었고, 이는 곧 자본과 정권의 무기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법개정 총파업이 패배한 투쟁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제도의 폐지를 위해 제2, 제3의 총파업을 선언하며 투쟁에 나섰다.”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의 구심이었던 일차적인 이유는 당대의 가장 첨예한 갈등이 모이는 곳이 곧 노동자의 일터와 사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의 해방을 향한 열망은 다양한 사회적 억압의 반작용이었고, 이와 같은 열망은 이후 한국사회의 계급적 이해와 요구를 포괄하는 ‘내셔널센터(민주노조의 중앙조직)’와 ‘산별노조의 건설’을 촉구하는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시기의 사회운동이 지녔던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이다. 노동운동이 ‘민중 항쟁’을 성찰한다는 것은 얼마간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막상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본다면 그렇게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권과 자본은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사회운동의 요구를 쉽게 부문화하거나 파편화하여 협상과 거래의 대상으로 삼기에, 사회운동은 자기 이해와 요구에 고립되는 수세적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대의 노동운동은 연결되고 연대함으로써 대중운동의 구심으로 작용하고자 노력해왔고, 이는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표현되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회운동의 의식이 지역이나 단위사업장에 갖히지 않고, 전체 사회의 정치적 의제에 책임과 소명을 감각하며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노선과 정파를 초월하는 어떤 ‘사적(史的) 원칙’이 작용했다는 뜻과도 같다. 이처럼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역사적 원칙을 발명하고, 집단적으로 그것을 사유하며 또 외화시켜왔다는 점에서 그 운동성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노동해방이라는 구호는 ‘계급투쟁의 축적’이 발명해낸 하나의 상징이자 구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정당들은 광장투쟁에서 주변부로 밀려났다. 거대한 촛불광장에서 진보정당들의 존재는 미미했다.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정당들은 조직력이 취약했다. 원내정당인 정의당은 탄핵 외의 정치적 방향을 제출하지 못한 채 보수 정치세력들과 차별성을 보이지 못했다. 진보정당들은 광장투쟁의 연단에서 배제됐다. 광장투쟁 과정에서 진보 정치세력이 보수 양당 정치세력의 대안으로 설 수 있는 정치적 전망을 만들어 내지 못했음을 의미했다.”

“한국노동운동의 두 가지 큰 방향인 민중해방노선과 민족해방노선은 각 노선의 궁극적인 목표인 ‘해방’보다는 단기적인 정치적 생존 전술에 치중했다. ‘NL-PD’ 대립 구도가 역사적 소명을 다하고 낡아빠져 ‘죽은’ 대립 구도로 치부되지만 이러한 전술적인 문제들에서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대립 구도로 작동하고 있다. 대부분의 운동 세력이 여전히 ‘해방’을 추구하고 있는 한국노동운동은 그 해방이 무엇인지 재정립하고 각자의 강령 문건에만 존재하는 사문화된 변혁성이 아닌 투쟁과 조직의 잣대가 되는 살아있는 변혁성을 정립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최근 수년간 한국노동운동 내 여러 세력이 ‘체제전환’을 들고나오는 것은 이런 요구의 반영이다.”

faa2791cad888fea2d431981cb384cf6_1778603227_985.png

노동해방은 한국노동운동사의 정체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포괄하는 말이다. 역사는 하나의 정체성이며, 이는 역사의 모든 시기에 도사리면서 국면마다 기준이 되는 하나의 ‘상징계(Imaginary)’이기도 하다. 동시에 원칙이라는 말은 언제나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밝히는 구체적인 예시와 근거들이 필요하다. 「한국노동운동사」는 철저하고 꼼꼼하게 이 캄캄한 지도를 밝혀내고 있다.

어떤 도시에는 산업박물관과 노동박물관이 병존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두 가지 관점이 대립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역사책을 넘길 때마다 왕과 영웅들의 얼굴만이 등장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사회는 현실정치와 사회운동의 두 바퀴로 나아가는 것이지 위정자들의 실정이나 선정 따위로 역사를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환하게 웃는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퍼스트 펭귄, 넥스트 제너레이션, 그리하여 숭고한 AI 시대의 문을 여는 유력한 정치인들까지. 그들의 다양한 표정이 1면을 장식하고, 결국엔 일그러진 만평과 냉소와 훈수에 찌든 칼럼으로 마무리하는 오늘의 역사에 그만 실증이 나버린 탓일까.

문학이나 사회비평이 새로운 세대(Next generation)를 구분하는 핵심적인 방식 중에 한가지는 이전 세대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음악이나 미술, 심지어는 자연과학에도 적용된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역사성을 감각하고 있는가’ 하는 뜻과 같다.

새로운 세대는 창의성이 아니라, 역사성에서 나온다. 시인 김수영은 인간의 역사를 일컬어 ‘거대한 뿌리’라고 했다. 뿌리가 잠식당할 때 식물은 숨을 거둔다. 노동자의 역사도 그렇다. 역사를 파악하는 것은 범인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원칙과 해방은 역사적인 것이고 그 때의 사회운동이 주요하게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무엇인지를 돌이켜보아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세대가 계승해야만 하는 것은 단지 ‘멈추지 않는 투쟁’이 아니라, ‘거대한 뿌리에의 감각’이다. 「한국노동운동사」는 그 뿌리가 아직 살아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가자, 노동해방!”이라고 외치고 있다.

08/05/2026
[여기, 우리의 이야기] 잔인한 계절, 죽은 자와 산 자들의 존엄을 묻다. ‘함께 비애에 빠지는 것, 그것이 연대의 시작이기에…이은주(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내가 매일 마주하는 이들은 세상의 경계 밖, 사회적 시스템...
28/04/2026

[여기, 우리의 이야기] 잔인한 계절, 죽은 자와 산 자들의 존엄을 묻다. ‘함께 비애에 빠지는 것, 그것이 연대의 시작이기에…

이은주(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내가 매일 마주하는 이들은 세상의 경계 밖, 사회적 시스템의 보호에서 배제되어 있는 이들이다. 현장에서 일어난 명백한 사고도 산재로 인정받지 못한 노동자,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고 쫓겨난 이주노동자, 불법 촬영의 숨은 폭력에 영혼이 난도질당해도 사측으로부터 아무런 보호조차 받지 못한 노동자다. 그리고 조직적 소외 끝에 스스로 생을 등진 이와 그 죽음의 진실을 붙들고 처절하게 바둥거리는 유가족들까지. 그들의 이야기는 진술서나 보고서의 문장이 되기 전, 이미 누군가의 피와 눈물로 쓰인 생존의 기록이다.

보름 전, E7-3(조선업 용접공)비자로 입국한 지 1년 만에 해고와 브로커의 협박 앞에 놓인 한 이주노동자를 만나기 위해 급히 노동부 조사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목격한 가해자의 논리는 치밀하고 정교했다. 근로계약서상 장소가 아닌 곳으로 파견을 보낸 불법 행위는 ‘피해 노동자의 요청에 의한 배려’로 둔갑해 있었고, 브로커를 통역자로 대동하고 매수된 동료들까지 사측 증인으로 나서 조직적인 거짓을 늘어놓았다. 사람이 아닌 '필요 노동력'으로만 취급하는 이주 정책이 불러온 결과였다. 불법과 위협이 ‘정당한 조치’라는 탈을 쓰고 피해자를 압박하는 현장은 그야말로 ‘정교한 악마’의 모습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해고를 철회하는 합의를 했다. 대신 그는 일자리를 잃지 않고 추방되지 않기 위해 체불 임금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주노동자와 함께 노동부를 나오며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정답 없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는 온전히 듣고 함께했는가? 사건이 쌓여갈수록 정리의 기술은 늘어갈지 모르나, 마음의 무게는 가벼워지지 않는다. 남은 피해자의 상실감을 보며 나는 다시금 뼈저리게 느낀다. 피해자의 고통은 늘 투박하고 파편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통받는 자 곁에서 함께하는 활동은 어쩌면 피해자의 파편화된 고통을 듣고 퍼즐을 맞추어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그러모아 의문점을 찾고, 가짜 배려 뒤에 숨은 진짜 폭력을 찾아내며, 피해자의 부서진 진실을 하나의 온전한 서사로 구성하는 일 말이다. 이 거대한 비극을 진술서, 보고서, 때로는 기자회견문이라는 고작 몇 장의 종이 위에 가둬야 한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서글퍼질 때가 있다.

또한 그 퍼즐을 맞추며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되새김질한다. 나의 언어가 권력이 되어 피해자의 진실을 검열하고 있지는 않은지, 수많은 사건 속에서 타인의 고통을 ‘사례’나 ‘데이터’로 치부하며 무뎌지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한다. 피해자의 거친 목소리를 정돈한다는 핑계로 그들의 날것 그대로인 진실을 나의 논리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내가 내딛는 발걸음, 말 한마디, 적어 내려가는 한 줄이 누군가의 생존과 존엄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서늘한 책임감을 잊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특히나 ‘정형화된 조사 체계’라는 틀 안에서 객관성이라는 미명 아래 그 아픔을 재단하거나 계량화해야 한다는 오류에 빠질 때가 많다. 하지만 인간의 아픔을 어떻게 자로 잰 듯 나누고 무게를 달 수 있겠는가. 조사 과정에 편견이 개입되는 순간, 우리의 시선은 은연중에 가해자의 논리에 동화되기도 한다. “왜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나”, “그 상황에서 그것이 상식적인가”라는 질문들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비수가 되어 꽂히는 2차 가해일 뿐이다.

조사기록에서, 부당해고를 다루는 근로감독관의 무심한 말투에서, 그리고 노동자의 상처 치유를 지원해야 할 업무상질병판정위원들의 심의 과정에 규정만을 내세우는 서늘한 풍경 속에서, 고통에 등급을 매기려는 시도가 도리어 피해자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비극을 현장에서 목격할 때 내 마음에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것을 경험한다. 가해자의 유창한 변명이 조사단의 중립성을 집어삼키고 진실이 '언어의 기세'에 눌려 왜곡되는 과정을 목격하는 일은, 조사의 탈을 쓴 또 다른 폭력이 재생산되는 생생한 현장을 지켜보는 일과 같았다. 이때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복잡한 감정은 결코 개인의 예민함이 아니다. 나는 그 불편함을 붙들고 질문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이 끝없는 질문과 막막함이야말로 나로 하여금 무너져가는 진실을 지탱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켜낼 여정에 나를 곧추세우는 힘임을 깨닫는다. 질문이 멈추는 순간, 나는 고통을 재단하는 행정가가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답이 보이지 않아 괴롭고 무력감에 슬픔이 깊어질 때도 있지만, 확신보다는 의심을, 매끄러운 결론보다는 투박한 질문을 품고 그들의 곁에서 걸어가려 한다.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함께 묻고 함께 비애에 빠지는 것 자체가 연대의 시작임을 믿기 때문이다.

4월 28일 ‘세계 산재 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지나 노동절로 향하는 이 계절은 너무도 잔인한 시간이다. 노동절이 ‘국가 지정일’로 정해졌고 노동자의 권익이 향상되었다는 화려한 수사들이 기념사를 채우겠지만, 그 화려한 그림자 뒤에서 우리는 여전히 동료를 잃는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의 굴레를 멈추기 위해 투쟁하던 화물노동자가 경찰의 비호 아래 살해당했다. 그 현장에서 함께 죽지 못했다며 동료는 자책의 눈물을 흘린다.

노동절이 기일이 되어버린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의 피해 노동자와 양회동 열사, 그리고 이천 물류창고에서 쓰러져간 이들까지. 오늘 우리가 지켜내지 못한 동료의 빈자리가 더 크게 다가오는 이 시기, 나는 다시금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의 연대는 죽음을 막지 못한 자책을 넘어, 산 자들의 존엄을 지키는 단단한 방벽이 되고 있는가.” 노동자들의 부서진 진실을 맞추는 일, 슬픔이 분노가 되고 분노가 다시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될 때까지 우리는 이 질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저 들리는 대로, 보이는 대로 그 아픔의 곁을 지키는 것. 비록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비애가 나를 짓누를지라도, 나는 이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이 비애야말로 우리가 고립된 섬이 아니라, 서로의 고통에 응답하는 존엄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억울한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은 그와 그들이 한평생을 살아오며 지키고자 했던 세상을 향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슬픔과 분노는 애도 투쟁의 불씨가 되어야 한다.

[다섯 시의 독서] 밥 짓는 여자들, 세상을 짓는 여성들[도서] 정다정, , 산지니, 2026양돌규(노동자역사 한내 운영위원)지방선거가 불과 두 달도 남지 않았다. 후보들이 선출되고 거리에 플래카드가 넘쳐난다. 매일...
21/04/2026

[다섯 시의 독서] 밥 짓는 여자들, 세상을 짓는 여성들

[도서] 정다정, , 산지니, 2026

양돌규(노동자역사 한내 운영위원)

지방선거가 불과 두 달도 남지 않았다. 후보들이 선출되고 거리에 플래카드가 넘쳐난다. 매일 여론조사를 하는 전화벨이 울린다. 뉴스를 보니 15년 전 무상급식을 반대하다가 사퇴했던 서울시장이 또 5선을 하겠다고 출마했다. 몇 년 전 그는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유치원 무상급식 추진’을 외치며 180도 달라진 태도를 보이기도 했는데, 그가 달라진 만큼이나 무상급식은 보편적으로 자리 잡았다. 1980년대에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어떤 책들 한 귀퉁이에서나 볼 수 있는 문구였는데, 지금은 유치원부터 직장인들까지 식판에 밥을 받아먹는 시대가 됐다.
이 책은 12년 차 급식 노동자를 어머니로 둔 필자가 2022년에 쓴 대학원 석사 논문 「학교 급식 노동자의 모순적 경험과 대응」을 바탕으로 한다. 저자는 그동안 학교 급식 노동자들이 담론화될 때 주로 이야기되던 △열악한 노동환경 △부당한 처우와 저임금 △산재 등의 내용 말고도 급식 노동자들이 얼마나 ‘숙련된 기술과 전문성을 가진 노동자’인지를 드러내고 싶었다고 밝힌다.
저자는 어머니와 이모를 통해 40~60대 기혼 유자녀 여성을 인터뷰했고, 또 직접 학교 급식실에 시간제 배식원으로 일하면서 동료들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대부분 10년 이상의 경력을 보유한 급식 노동자 16명의 인터뷰가 이루어졌고 그 증언을 바탕으로 논문을 썼다.

한국 학교 급식의 확대와 급식 노동자의 탄생

한국의 학교 급식은 1950~1960년대 외국의 원조기관 지원을 통해 마련된 탈지분유, 빵, 수제비, 건빵 같은 ‘구호 급식’ 형태로 시작됐다. 1973년에는 외국의 원조가 종료됐는데, 1977년 서울 시내 학교에 제공된 빵으로 인한 식중독 사태로 급식이 전면 중단됐다. 하지만 1981년 학교급식법령이 제정되면서 학교 급식이 재실시되었고 점차 대규모 인원을 위해 밥을 짓는 전문 설비를 갖춰갔다.
그러다가 1990년대 들어 ‘여성의 가사 분담 완화를 통한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라는 정책적 목표 아래 ‘가사와 육아의 사회적 분담 체계’ 마련을 위한 세부 과제로 ‘학교 급식의 전면 실시’를 추진하기에 이른다. 이는 기혼 여성의 고용률 확대를 통해 당시 ‘노동력 부족’을 타개하고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또 1990~2000년대 여성인력개발센터 등을 통한 직업훈련이 제공됨에 따라 미용, 봉제, 웨딩플래너, 판매 및 사무 등 ‘여성 적합 직종’에 학교 급식 일자리 역시 포함시킴으로써 학교 급식 일자리가 급속히 확대됐다. ‘학교 급식 일과 집안일 간의 유사성’, ‘비교적 빠른 퇴근 시간으로 일과 가정을 병행하기에 적합’ 등의 이유로 주부 재취업에 적당한 직종, 기혼 여성에게 적합한 일자리로 홍보됐다.
그 결과 학교 급식 일자리는 여성이 99% 가까이 차지할 정도로 대표적인 ‘기혼 여성 직종’이 됐다. 이 밑바탕에는 “기혼 여성이 일과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고 그래서 이들을 ‘부수적 노동자’로 여기게 만들면서 저임금을 정당화하고 일용직 채용을 정당화했다.

급식 노동자는 일과 가정 모두를 잡을 수 있을까

이 책에 등장하는 급식 노동자들은 서로 닮아 있다. 특히 살아온 과정이 그렇다. 학교 교육을 마친 후 판매직, 생산직, 서비스직 등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들은 결혼과 임신을 계기로 노동시장에서 퇴장했다. 이후 자녀를 양육하면서 주부로 지내지만, 자녀가 성장함에 따라 여성들은 다시 노동시장으로 재진입하게 된다.
이들이 학교 급식 일자리에 취업한 가장 큰 이유는 ‘자녀가 학교를 마친 후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점’을 꼽는다. 학교 급식 노동자는 보통 아침 7~8시에 출근해 4시에 퇴근하는데 이는 자녀가 학교에서 지내는 시간과 비슷하다. 주말, 공휴일, 방학 등의 일정도 똑같다.
이 바탕에는 가사노동뿐만 아니라 양육과 돌봄이 전적으로 여성의 일로 맡겨지는 성역할 고정관념이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학교 급식 일자리를 선택하는 것은 여성을 둘러싼 실질적 제약들과의 복합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내가 내 자식이랑 똑같이 생활이 되잖아. 내 자식이 학교를 안 가면은 우리 급식도 안 하잖아. 그리고 또 내 자식이 시험 때 쉬면은 학교 급식도 시험 때 쉬잖아. 그러니까 애들이 집에 있을 때는 나도 집에 있고, 애들이 학교 가면 나도 출근을 하고 그게 좋으니까 학교 급식을 한 거지.”(58~59쪽)

그렇다면 여성들은 급식실 취업 후 일과 가정 양립에 성공하였을까? 저자는 오히려 이것이 여성들을 옭아매는 ‘족쇄’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급식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여성들은 다시 ‘집안일’을 시작한다. 저녁식사 준비, 청소, 빨래, 자녀 케어 등 ‘산더미 같이 쌓인 집안일’을 해치워야 한다. 학교 급식 업무와 집안일의 유사성은 ‘퇴근 없는’ 일의 연속일 뿐이고 그 가운데 이들은 체력적, 정신적으로 소진되고 있다.
더구나 ‘주부 노동자’라는 호명은 이들의 임금을 낮추는 효과를 낳고, 또 방학 때는 급여가 지급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방학 때 단기 아르바이트 같은 일자리를 구하곤 한다. 처음 이 일자리를 구했던 이유였던 ‘자녀와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한 일자리’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미로 속에 갇힌 셈이다.

학교 급식 노동의 숙련

학교 급식이나 집안일이나 비슷하다는 인식은 사회 일반의 인식이기도 하지만 노동자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급식실에서 일을 경험하고 나면 가정에서의 가사노동 경험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집에서는 쓰지 않는 도구, 노동 과정, 재료의 양, 무거운 중량, 전혀 다른 조리 기구, 대용량 음식 조리법 등에서 차이가 있다.
그 노동 과정을 거치면서 급식 노동자들은 숙련 노동자로 거듭나게 되는데, 그러나 이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는 학력, 학벌 같은 교육 수준이나 자격증 등으로 숙련을 판단하곤 하는데 ‘한낱 집안일’로 취급되는 이들의 노동은 기존의 숙련 개념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학자들은 숙련 개념을 재구성해 그동안 비숙련으로 간주해 온 노동을 재평가해 왔다고 한다.
급식 노동자들이 노동 과정에서 체득하는 지식과 노하우는 대부분 ‘경험적 지식’에 해당한다. 이는 실전에서 시행착오 등을 겪으며 얻는다. 그리고 새로운 노동자에게 말과 시연을 통해 전수된다.

학교 급식 노동과 안전

한국의 친환경 무상급식은 학교 급식 노동자의 헌신과 희생 없이는 운영될 수 없었다. 그러나 학교 급식실의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각종 산업재해가 지속적으로 발생해 왔다. 근골격계질환도 가장 대표적인 질병 중 하나인데 노동강도가 높다고 알려진 조선업종의 근골격계질환 발생률이 70~80%인데 비해 급식 노동자들의 그것은 95.8%로 극악한 수준에 달한다고 한다.
또한 급식 노동자들의 폐암 발병 비율은 매우 심각한 지경이다. 2022년 국회에 제출된 교육부 자료 ‘학교 급식 노동자 폐암 건강검진 현황’ 분석에 따르면 건강검진 결과를 통보받은 노동자 5,979명 중 61명에게서 “폐암이 의심된다”는 소견이 나왔다. 이는 2019년 한국 여성의 폐암 발생률보다 28배 정도 높은 수치다. 근로복지공단 측은 “(노동자들이) 고온의 튀김·볶음·구이 요리에서 발생하는 조리흄에 노출됐다. 이런 조리행위가 폐암 발생의 위험도를 높인다”고 판단했다.
2025년 10월에는 근로복지공단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 ‘학교 급식 종사자 폐암 산업재해 신청 현황’이 공개됐다. 이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학교 급식실 폐암 산업재해 신청은 213건, 승인은 178건이며, 이 가운데 15명이 사망했다. 한국 사회 전국 평균 산업재해율은 0.66%인데 반해, 학교 급식실은 3.7%에 이르고 이는 사회 평균보다 5배나 높은 형국이다.

급식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세상을 짓다

지금은 여당에 가 있는 한 국회의원이 2017년 국민의당 의원 시절 당 회의에서 급식 노동자들을 두고 “밥하는 동네 아줌마”라 비하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 ‘밥하는 동네 아줌마’들이 학교 현장에서 보통 ‘행정실’에 소속돼 있다. 하지만 이들은 행정실의 다른 직원들과 동료로서의 관계를 맺고 있지도 않으며 소속감도 느끼지 못한다. 비정규직에서 공무직으로 전환되고 나서도 여전히 학교의 교직원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학교 안에서 여러 정보로부터도 소외되고 고립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밥하는 동네 아줌마’들이 노동조합으로 조직돼 노동자로 호명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것이 달라져 왔다. 노동조합은 여러 정보를 바탕으로 학교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됐고 개별 학교 차원에서 할 수 없는 정책적 제언과 요구까지 해나갈 수 있게 됐다. 노동조합은 노동조건 개선, 급식실 내 환경 개선 토론회, 각종 수당 지급, 고용 형태 변경 등 급식 노동자들의 실질적 삶과 노동의 개선을 위해 싸워왔다.
급식 노동자들 투쟁의 성과로 2023년 윤석열 정부의 방치 속에 일몰 폐지됐던 공무직위원회가 2026년 2월 12일, 공무직위원회법 법제화로 다시 세워졌다. 이에 따라 학교비정규직 차별 해소의 근거가 마련됐고 정부의 사용자 책임이 명시됐다.
또한 2025년 10월에는 41개 시민사회단체와 제 정당, 그리고 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에 속해 있는 여러 노동조합이 힘을 모아 ‘안전한 노동 행복한 급식 100만 청원운동본부’를 결성하고 학교급식법 개정 운동에 돌입했다. 운동본부는 △급식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 보장 △최소 조리 인력 기준 마련 △학교급식위원회에 학부모와 노동자 참여 보장 △민간위탁 중단 및 직영 급식 유지 △방학 중 무임금 문제 해결 △폐암 산재에 대한 범정부 종합대책 수립 등을 요구했다.
급식 노동자들은 학교급식법 개정을 위한 서명운동, 대통령실 앞과 국회 앞 농성, 108배 행진, 총파업 등 투쟁을 해나갔다. 전국적으로 322,896명의 시민이 참여해 국민 청원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개정 학교급식법은 마침내 2026년 2월, 국회에서 99.57%의 찬성률로 통과됐다. 울긋불긋한 앞치마를 차려입고 국회에서 방청하던 학교 급식 노동자들은 손을 모아 얼굴을 감싸 쥐고 눈물을 흘렸다.
학교급식법 개정에 따라 이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학교 급식 종사자의 건강과 안전 보장에 대한 시책 강구 △3년마다 교육부 장관이 학교 급식에 관한 기본계획 수립 △학교 급식 시설·설비·인력배치 기준 마련 시 학교 급식 종사자의 건강과 안전 고려 △학교 급식 종사자 1인당 적정 식수 인원 기준을 대통령령으로 정해 이를 준수하도록 한다는 등의 내용이 시행될 것이다.
공무직위원회 출범, 그리고 학교급식법 개정이라는 새로운 조건 아래 급식 노동자들의 새로운 실천의 순환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맞상대가 될 이들이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선출될 시·도교육감들이다. 노동자들이 이들과 때로는 대화하고 때로는 싸워가며 ‘지어갈 세상’이 자못 궁금해진다. 이 나라에서 매일 식판에 밥을 받아먹는 사람들이 몇천만 명은 될 것이다. 그 밥을 먹은 이들이 일을 해서 세상이 굴러간다. 그렇다면 이들이 먹는 밥을 하는 노동이 원초적인 셈이다. 밥 짓는 노동이 먼저 있었다. 밥 짓는 노동자는 오늘도 세상을 짓고 있다.

[텔레그램] https://t.me/+JRyXRFcgs8MxOTE1
[홈페이지] https://www.hannae.org/bbs/board.php?bo_table=newsletter&wr_id=155

[거슬러보면] 노동절을 누가 언제 되찾았는가이황미(노동자역사 한내 기획국장)2025년 11월 11일 ‘근로자의 날’ 명칭이 ‘노동절’로 바뀌었다(‘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노동절 제정에 관한 법률’로 개정...
15/04/2026

[거슬러보면] 노동절을 누가 언제 되찾았는가

이황미(노동자역사 한내 기획국장)

2025년 11월 11일 ‘근로자의 날’ 명칭이 ‘노동절’로 바뀌었다(‘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노동절 제정에 관한 법률’로 개정). 2026년 4월 6일 국무회의 의결로 노동절은 법정공휴일이 됐다(3월 31일 ‘공휴일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국회 본회의 통과). 이로써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게만 적용되던 유급 휴일이 관공서, 공공기관 등으로 확대된다고 한다.
이리되기 전, ‘5월 1일’은 ‘노동절’이었다. 그런데 1959년 이승만 정권이 노동절을 3월 10일(대한노총-한국노총 창립일)로 바꿨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바꿨다. 문민정부라 내세웠던 김영삼 정권은 1994년 날짜는 5월 1일로 돌려놨지만, 명칭은 ‘근로자의 날’을 유지했다. 그로부터 다시 32년 만인 2026년에 ‘5월 1일 노동절’로 돌아왔고, 법정공휴일인 빨간 날이 됐다. ‘노동절’이 ‘노동절’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절은 결코 ‘법조문’에 머물지 않았다. 달력의 ‘1일’이 검은 글씨였어도, 그 아래 ‘근로자의 날’이라 쓰여 있었어도, 노동자계급에는 어김없이 싸우는 ‘노동절’이었다.

1백년 넘도록 해마다 싸웠다

1889년 7월 14일,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프랑스 파리) 결의로 1890년부터 전 세계 노동자들이 5월 1일 노동절에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기치 아래 대규모 시위·행진·파업에 나섰다. 그 전통과 역사를 면면히 이어온 메이데이는 전 세계 노동자가 하나로 뭉쳐 노동자계급의 위력을 과시하고 투쟁과 해방의 결의를 다지는 날로 자리 잡았다. 노동자뿐 아니라 농민, 빈민 등과 연대하는 투쟁의 날임과 동시에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날이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조선노동공제회 등 노동자 조직이 결성되기 시작한 1920년부터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동맹파업, 시위행진 등의 형태로 전개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제가,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 단독정부 수립 후에는 남한 정부가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행사를 감시하고 봉쇄했지만, 한국의 노동자들은 갖은 탄압과 폭력, 수배와 구속에도 노동절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중단하지 않았다.(한내레터, https://www.hannae.org/bbs/board.php?bo_table=newsletter&wr_id=65 참조)

‘3월 10일’도 ‘근로자의 날’도 거부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처음 맞은 1988년 노동절, 노동운동단체들은 노태우 정권의 거센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세계노동자의날 기념 노동3권 쟁취 수도권노동자 결의대회’(연세대)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8시간 노동, 지역 및 산별노조 쟁취, 파업의 자유 등을 결의하고 교문 밖으로 진출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해 노동운동진영은 단일한 노동법 개정안으로 ‘3.10 근로자의 날 폐지와 5.1 노동절 복원’을 제출했다.
세계노동절이 딱 100년째 되는 1989년 민주노조들의 전국조직인 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는 노동절의 전통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하고 대중적인 집회투쟁을 벌였다. 정부의 원천 봉쇄 방침에 맞서 4월 29일부터 시작된 노동절 투쟁은 5월 1일 전국 13개 시·도(서울, 인천, 성남, 부천, 안양, 안산, 수원, 대구, 울산, 마창, 부산, 광주, 전북)에서 총회, 집회, 가두투쟁으로 확산했다. 메이데이 투쟁은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학생들의 동맹휴학 등 전체 민중진영의 연대투쟁으로 발전했다.
1990년 출범한 전노협은 정부가 강제해온 ‘3월 10일 근로자의 날’을 폐기하고 ‘5월 1일 노동절’을 공식 발표했다. 5월 1일 경찰의 봉쇄 속에서도 15개 지역, 2백50여 개 노조에서 일제히 노동절 기념식을 진행했다. 194개 노조, 10만여 명의 조합원이 5월 1일 전면 휴무에 돌입했고, 휴무에 돌입하지 않은 노조도 사업장별로 기념식을 한 뒤 지역별 기념대회에 참가했다. 그해 노동절 투쟁은 5월 4일까지 312개 사업장에서 연인원 34만 명이 참여한 전노협 전국총파업으로 발전했다.
1991년 노동절에도 정권의 강경대 열사 폭력 살인 사건을 계기로 전국 14개 지역에서 노동자·학생·시민 등 10만여 명이 모여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노동절 쟁취를 위한 5월 1일 휴무 방침 결의는 법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이미 단체협약에 5월 1일을 휴무로 쟁취한 사업장들로부터 시작한 유효한 투쟁이었다.

그해 핵심 요구 집약해 정권과 자본 압박

노동자들은 해마다 5월 1일이면 그해의 핵심 요구를 집약해 강력한 투쟁의 포문을 열며 정권과 자본을 압박했다. 그렇게 5월 노동절은 11월 전국노동자대회와 함께 민주노조와 노동자들에게 중요한 투쟁으로 자리 잡았다.
1994년 근로자의날법이 개정돼 날짜가 3월 10일에서 5월 1일로 바뀌었다. 35년 만에 합법적으로 맞이하는 메이데이였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정권은 임투 승리와 민주노총 건설을 결의하며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노동절 집회를 원천 봉쇄했고, 가두로 나선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진압했다. 노동자들은 최루탄을 쏘며 막아서는 경찰에 맞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싸워야 했다.
1995년 민주노총 출범 후에도 노동절은 ‘투쟁’하는 날이었다. 1997년 5월 1일 장충단공원에서 노동절대회를 마치고 마무리 집회 장소인 종묘공원을 향해 행진에 나섰다. 합법적 절차에 따라 집회신고까지 마친 행진이었지만 경찰은 대회 시작 전부터 행사장 주변에 병력을 배치하고 검문 검색을 벌이더니 행진이 시작되자 페퍼포그를 동원해 최루탄을 쏘아대며 이에 항의하는 참가자들을 곤봉으로 구타하고 연행했다.
1998년 노동절은 5말 6초로 예정된 총력투쟁의 서막을 알리는 전국 집중 투쟁이었다. 노동자·시민·학생 5만여 명이 ‘고용안정과 민중생존권 사수’를 외쳤다. 그러나 집회가 끝나기도 전에 금속 대오가 모여있던 종로3가 거리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싸움이 시작됐다. 참가자들은 위력적인 가두투쟁을 전개했지만, 무수한 노동자·학생이 다치고 연행되고 구속됐다.

노동자 승리하는 그날까지 ‘휴일’ 아닌 ‘투쟁’

1999년 11월 23일 민주노총이 합법화된 후 2000년 노동절 집회는 4월 29일, 토요일에 진행했다. 2만여 명이 서울역광장을 메운 가운데 5월 총파업을 결의했다. 대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명동성당을 거쳐 종각까지 거리행진을 벌인 뒤 종로 2가 일대의 왕복 10차로를 점거하고 마무리 집회를 했다. 마무리 집회를 경찰이 진압하는 바람에 10여 명이 다쳤고 이에 격분한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1시간가량 공방이 벌어졌다. 당시 노동절 투쟁을 5월 1일에 하지 않는 데 비판이 일었다. 민주노총은 “애초 노동절 당일인 5월 1일 기념대회를 열 예정이었으나 이날이 이틀(사흘) 연휴의 마지막 날임을 감안해 더 많은 노동자의 참가를 이끌기 위해 날짜를 조정했다”( 100호, 2000.4.21)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May Day’가 ‘April Day’가 돼버렸다며, “노동절을 사수해야 한다”는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 몇몇 지역에서는 방침을 거부하고 5월 1일에 노동절 집회를 했으며, 또 일부 단위는 5월 1일 서울 종묘공원에서 ‘노동절 민중연대 투쟁대회’를 독자적으로 진행하다 다수가 연행됐다. “민주노총이 합법화됐으니 이제 날짜가 중요한 게 아니라 노동절을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5월 1일 노동절’을 지키고자 하는 열망과 투쟁의 필요성이 더욱 강력했다.
한편 메이데이 계기(1886년 헤이마켓광장 투쟁)를 만들었던 미국의 노동절은 ‘9월 첫째 월요일’이다(1893년 미국노동총동맹이 변경, 1894년 미 의회가 공휴일 지정).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 노동자가 투쟁하는 날이었던 건 1백여 년 전이고, 지금은 그저 여름 끄트머리에서 쇼핑과 여가를 즐기는 긴 주말 휴가일 뿐이다.

노동절 의미 되새기는 민주노총 투쟁 계속되길

정권의 입맛 따라 날짜를 바꾸고 이름을 바꿔왔지만, 노동절은 그 법에 따라 흔들려온 게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일관되게 ‘5월 1일’로 지켜왔다.
정부는 “노동의 가치를 전 국민이 함께 기념할 수 있도록” “공휴일 지정을 적극 추진했다”고 밝혔다.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노동절 명칭 복원에 이은 공휴일 지정은 노동의 가치와 존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새로이 했다는 점에서 하루 휴일, 그 이상의 의미와 상징성이 있다”며 “일하는 사람 모두의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행복한 일터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다. 좋은 말이고, 좋은 일이다.
그런데 한국의 어떤 공휴일에 ‘모든 노동자’가 쉴 수 있었던가. 특수고용, 플랫폼, 교대제,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가 떠오른다. 137년 전 요구였던 ‘8시간 노동’을 아직도 외치고 있는 노동자들이 떠오른다. ‘노동절’의 의미보다 공휴일 하루 늘렸다는 공치사로만 들린다면 속 좁은 걸까. 노동부는 노동절로 명칭 변경과 공휴일 지정을 기념해 노동자를 초청하는 기념식과 ‘걷기대회’ 등 여러 행사를 진행하겠다고 한다. 노동자에게 필요한 건 생존에 절실한 법·제도의 실현이지 걷기가 아니다. 노동절 기념한답시고 자본과 정권이 모여 애국가 부르는 광경을 보고 싶지는 않다.
2026년 노동절에 그들이 말하는 ‘전 국민’에서 배제되고 있는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는 민주노총을 기대한다. 노동절이 아직 축제일 수 없는 이유는 너무 당연하게도,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텔레그램] https://t.me/+JRyXRFcgs8MxOTE1
[홈페이지] https://www.hannae.org/bbs/board.php?bo_table=newsletter&wr_id=154

[그때 그사람들] 이현상의 은신처, 익선동 9번지나영선(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일제강점기 개량한옥촌 흔적 간직한 익선동서울지하철 5호선 종로3가역에 내리면 낮고 오래된 한옥들이 이어진 골목이 눈에 들어온다. 익선동이...
07/04/2026

[그때 그사람들] 이현상의 은신처, 익선동 9번지

나영선(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원)

일제강점기 개량한옥촌 흔적 간직한 익선동

서울지하철 5호선 종로3가역에 내리면 낮고 오래된 한옥들이 이어진 골목이 눈에 들어온다. 익선동이다. 가회동 삼청동 일대의 일명 ‘북촌 지역’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는 한옥 거리다. 하지만 눈여겨본다면 북촌의 한옥이 넓은 도로와 정돈된 환경 속에 놓여 있다면, 익선동은 오래된 골목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개량한옥촌의 흔적을 살피기에는 오히려 이곳이 더 적합하다.
익선동은 조선 25대 임금 철종이 즉위 이전에 태어나 10여 년을 보낸 곳이다. 왕이 되기 전 거처였던 ‘잠저’는 궁으로 불렸고, 그 이름이 ‘누동궁’이다. 철종이 즉위한 이후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사당과 형 이욱의 거처를 마련하면서 붙여진 명칭이다. 이 집의 대문 좌우에 있던 행랑, 곧 ‘익랑’이 발달하면서 ‘누동’보다 ‘익랑골’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게 됐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거치며 오늘날의 ‘익선동’이라는 지명이 정착했다.

이재유 이순금 이관술도 살았던 한옥마을

누동궁은 그 면적이 2,500평에 이르는 거대한 저택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가 되면서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고, 서울의 인구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새로운 주택수요가 급증하면서 근대적 부동산 개발이 본격화됐다. 가회동·삼청동·계동 일대에서 시작된 개발의 흐름은 익선동 누동궁 터로 확장됐고, 그 결과 오늘날의 한옥마을이 형성됐다. 이 개발을 주도한 인물은 정세권이다. 그는 1920년대 주택 건설로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으며, 관여한 주택만도 6천여 채에 이른다. 동시에 신간회, 조선어학회, 물산장려운동 등에 자금과 건물을 지원하며 사회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정세권이 주도한 개량한옥은 획기적이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새로운 주거 형태였다. 수도와 전기를 도입했고, 마당 가까이에 화장실을 배치해 생활의 편의성을 높였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 또한 호응을 얻었다. 1920~1930년대의 익선동은 잘 계획된 골목과 신식 주택이 들어선 신흥 주거지였다. 이런 조건은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과 직장인들이 자취하거나 하숙하기에 선호하는 공간이 됐다. 이현상, 이재유, 이순금, 이관술 등등의 거처도 이곳 익선동이었다.

1928년 9월 이곳에서 체포된 이현상

이현상은 1928년 9월 11일에서 12일 사이 이곳에서 체포됐다. 당시 그는 보성전문학교 법학부 1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이미 민족해방과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하는 삶을 선택한 상태였다. 1926년 6·10 만세운동 당시 중앙고보 4학년으로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복역한 경험은 그의 사상 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를 심문한 경찰은 피의자 소행 조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견 온순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음험한 자로서 과묵하며 의지가 대단히 강고함”, “극렬한 사회주의자로서 의지가 매우 강고하므로 개전할 가능성은 없음” 이러한 평가는 비록 식민 권력의 시선이지만 장기간의 예심 기간 조직과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인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이기도 하다.
조서에 따르면 그는 1928년 4월 하순 김복진의 권유로 고려공청에 가입한 뒤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 ‘야체이카(세포 조직)’의 책임자가 되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비밀결사 조직이 가입 직후의 인물에게 핵심 역할을 맡길 리 없다. 이미 이전부터 조직 내부에서 검증된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이현상은 6‧10 만세 투쟁으로 중앙고보에서 퇴학당한 이후 자신의 고향인 전북 금산을 중심으로 청년 조직을 주도적으로 건설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군조직을 넘어 면 단위까지 청년 대중조직을 확장했다. 이러한 조직 활동은 개인의 자발성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이미 상위 조직과의 연결 속에서 이루어진 활동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일제의 잔혹한 심문에도 조직과 신념 사수

체포 이후 그의 진술 전략은 일관되게 조직 보호에 맞춰져 있었다. 그는 필요하다면 절도 혐의까지 뒤집어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근우회 간부이자 조선공산당 학생 담당이었던 김필수의 부탁으로 80원이 든 가방을 맡았다가, 이름도 모르는 인물(김모)에게 전달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경찰은 김필수와의 관계, 전달 대상의 신원을 집요하게 추궁했지만,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일경은 엄혹한 심문에도 이현상으로부터 김필수의 행방도, 김모라는 이의 정보도 알아내지 못한다. 일경의 모욕에도 “그렇게 보아도 어쩔 수 없다”라는 태도로 버텨냈다.
이현상이 보호하려 했던 김모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김필수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녀는 조선공산당의 추천으로 1928년 10월에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고 1933년부터 함경남도 일대에서 남편 임민호와 함께 태평양노동조합운동이라는 당 재건 활동을 하다 체포됐다.
김필수와 이현상이 만난 시점은 김필수가 모스크바로 가는 출국 직전인 9월 4일이었다. 김필수가 인편으로 이현상을 자신의 거처로 불러 무엇인가를 논의했음을 고려하면, 이현상은 조직 자금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임무의 전모를 알지 못했더라도, 진술 과정에서 지켜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활동가들 체포·고문·수감 이후 변절하기도

1928년 3월, 고향 금산에서 올라온 이현상의 첫 거처는 화동이었다. 경성제일고보의 동남쪽 담벼락을 따라서 지어진 집이었다. 같은 조직원인 최성환과 강병도의 거처 역시 소격동과 안국동 일대, 도보 5분 이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연이라 보기 어려운 배치다. 그의 하숙집 주소는 경성부 화동정 121번지였으며, 현재는 정독도서관 인근 도로에 편입돼 흔적을 찾기 어렵다.
검거의 계기는 서울 시내 고등보통학교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한 동맹휴학이었다. 경찰은 그 배후를 추적하며 수사를 확대했고, 이현상에게도 수사의 손길이 미쳤다. 여름방학 동안 고향에 다녀온 그는 경찰이 하숙집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잠행에 들어갔다. 소격동 일대 지인의 집에서 일주일가량 몸을 숨긴 뒤, 익선동 9번지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이 은신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사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체포됐고, 두 번째 수감 생활이 시작됐다.
1928년 2월에 당대회를 치른 ‘2월당’은 당대회 직후부터 당 지도부들의 체포가 이어졌다. 일경들은 당 내부의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듯 조직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기층의 당 조직은 위축되지 않았다. 대중투쟁의 조직과 투쟁의 성과로 조직을 확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현상의 역할은 학생대중을 조직하는 일이었고, 식민지교육 철폐와 민족적 차별에 대한 저항 등 대중의 조건에 맞추어 각 단위 학교의 동맹휴학을 힘 있게 조직하려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성장하는 선진 학생을 조직으로 결집했다. 이현상은 이 시기 조선공산당의 당원이었고 고려공청 야체이카의 대표였으며, 서울청년회의 집행위원, 조선학생과학연구회(조과연)의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보성전문 연희전문 경성제일고보의 학생들을 조직해서 독서회로 조과연으로 그리고 당으로 조직하는 일선 조직가였다. 그리고 고향에 아직 어린 두 아이를 둔 아버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중층적 활동은 당시 운동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함께 활동하던 동지들 여럿은 진주에서 서울 이재유그룹의 당 재건 운동에 참여했고, 일경의 가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하지만 운동의 대의에서 일탈한 자도 있었다. 이현상의 조직상 지도선인 김복진과 그 동생이었던 김기진이었다. 그 둘은 카프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수형을 마친 이후 운동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간 것을 넘어 친일 행적을 일삼았다. 형제는 예술적 재능이 있었다. 형은 조각가로 손꼽혔고 동생은 글을 잘 썼다. 그들은 악명높은 친일분자의 동상을 제작하고 일제의 전쟁에 참여하라는 선전활동에 가담했다.

수많은 이현상들은 사회주의 운동 근간 지켜나갔다

이현상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1세대는 아니다. 하지만 6·10 만세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라는 대중투쟁에서 단련된 세대였다. 수백 명의 이현상은 1930년대 당 재건 운동의 주요 활동가들로 성장한다. 선배 세대의 이탈에도 이 새로운 세대는 전국에 무수한 당 재건그룹을 결성하고 숱한 패배에도 사회주의 운동의 근간을 지켜나갔다.

[참고자료 및 논문]
- 김성민, 「1920년대 후반 서울지역 학생운동의 조직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2004
- 양지수, 「1920년대 후반 사회주의계열 학생운동연구」 연세대학교 석사논문, 2006
- 윤경로, 「이현상 심문조서 이현상과 1928년의 학생공산당사건-고려공산청년회 산하 사회과학연구회원들이 중심이 된 학생운동사건」, 역사비평, 1988.12
- 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국 사회주의 운동 인명사전』, 창작과비평, 1996
- 김경민,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이마, 2017
- 안재성, 『이현상평전』, 실천문학사, 2009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
-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https://nl.go.kr/newspaper/
- 국토정보플랫폼 https://map.ngii.go.kr/mn/mainPage.do
- 공훈전자사료관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x.do

[텔레그램] https://t.me/+JRyXRFcgs8MxOTE1
[홈페이지] https://www.hannae.org/bbs/board.php?bo_table=newsletter&wr_id=153
[사진] 이현상(1905~1953), 그가 체포된 익선동 9번지.

[역사로 보는 오늘] 생존 문제는 남녀가 다르지 않다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세계적 흐름에 발맞춰 여성 평등으로 나아가68혁명이 기폭제가 되어 성장한 여성해방운동 실천의 결과, 세계적 흐름은 여성의 평등한 권...
31/03/2026

[역사로 보는 오늘] 생존 문제는 남녀가 다르지 않다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사무처장)

세계적 흐름에 발맞춰 여성 평등으로 나아가

68혁명이 기폭제가 되어 성장한 여성해방운동 실천의 결과, 세계적 흐름은 여성의 평등한 권리 보장으로 나아갔다. 그 흐름에서 UN은 남녀평등권 보장을 목적으로 1975년을 ‘세계 여성의 해’로 선포하고 1979년 12월에 여성차별철폐협약을 채택, 가입국에 남녀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입법, 행정, 사법 조치 의무를 부과했다. 여성 노동이 세계 노동인구의 34%를 차지했지만 대부분 임금 승진 차별을 받고 있던 현실을 반영한 조치였다. 한국도 1983년 5월에 서명, 1985년 1월 26일부터 국제협약이 국내법과 같은 효력이 발생했다. 이어 1987년 10월 개정헌법에 고용 임금 및 근로조건에서 여성에 대한 부당한 차별 금지(제32조 제4항)와 여성의 권익향상 및 복지증진(제34조 제3항), 모성보호(제36조 제2항)를 위한 국가의 노력 의무규정을 신설했다.

1975년 UN 여성의 해를 맞아 한국의 여성단체, 여성 문제 전문가들은 교과서 내용 개정, 대학 전공 선택에서 이과 계통 진출 기회 보장, 여자대학교 교과과정에 여성 문제 연구 과목 신설, 교육 시설 평준화 등을 요구했다. 무엇보다 이때 경제적 균등을 주장했는데,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 승진 기회균등, 결혼 퇴직제 폐지, 여성 조기 정년제 개정, 재해보상에서 남녀 차별 폐지, 직장에서의 기술교육 과학교육의 남녀 기회균등, 여성단체 및 종교기관에 근로자보호위원회 설치 건의, 근로 여성을 위한 정기 교육 등이었다. 그러나 유신 정권 아래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변화 움직임은 노동현장에서 시작됐다. 1975년 현재 한국노총 가입 70만 조합원 중 23만여 명이 여성조합원이었다. 당시 산별노조 중 여성노동자가 많았던 자동차노조에선 안내양의 인격 대우 문제, 금속노조에선 여성노동자의 건강관리 문제가 제기됐다. 체신⸱금융노조는 차별정년 폐지와 임금인상을 내걸고 사용자와 단체교섭을 벌이기도 했다. 몇몇 은행에서는 여은행원 공개 채용 요구를 관철하기도 했다.

이후 1987년까지 한국 사회 여성노동자는 꾸준히 증가했다. 여성 고용률은 44.1%에 이르러, 남녀 격차는 25.6%였다. 하지만 여성노동자는 남성노동자 대비 51%의 임금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 1987년을 전후로 여성에게 동등한 권리 부여와 모성보호 차원에서 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등장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건전한 체제 내적 근로자 세력의 육성은 특히 그 체제의 흥륭과 존망을 가름하는 아킬레스건”이라며 민정당 이상재 의원이 ‘화합 국가’와 ‘체제 우월성 확보’를 저해하는 요소의 하나로 ‘임금구조’를 꼽았다. 학력 간 임금 격차, 직종 간 임금 격차, 더욱이 취업 보수 승급 승진 등 모든 측면에서 남녀 간의 차별이 문제라고 했다. 이러한 격차와 차별은 노동운동의 급진화를 불러온다는 지적이었다(12대 국회 131회 정기회의, 1986.10.30).

다음 해, 우려한 대로 ‘화합’ 대신 ‘전복’을 꾀한 세력이 6·10 민주화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을 일으켰다. 그해 겨울 국회에 노동쟁의조정법, 근로기준법, 의료보험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노사협의회법 개정안 등 이른바 ‘국민 화합을 위한 법안들’이 줄줄이 상정됐다. 그중에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건도 있었다.

국회에 상정된 남녀고용평등법안은 “고용에 있어서 남녀를 차별하는 고용 관행을 바로잡고 육아휴직을 제도화하며 여성의 직업능력을 적극 개발함으로써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기여하게 하기 위해” 제안됐다(137회 국회 본회의 회의록, 1987.10.30). 16시 43분에 상정된 안건이 5분 만에 이의 없이 원안 통과됐고 12월 4일 공포돼 1988년 4월 1일 시행됐다.
법은 여성노동자의 채용 및 교육, 승진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모성보호를 위해 육아휴가 보장, 탁아소 설치 등을 규정했으며 근로 분쟁 조정을 위해 근로여성위원회, 고충처리기관, 고용문제조정위원회 등의 설치를 규정했다.

법이 통과된 시기가 12·16 대통령 선거 즈음이었으므로 여성 유권자를 겨냥한 선거용 아니냐, ‘체제 수호’를 위한 조치가 필요해 ‘내어 준’ 법안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이를 반영하듯 법은 출발부터 한계가 명확했다. 차별임금 금지규정이 빠져 있고, 법의 실효성을 보장해주는 벌칙 규정도 근로기준법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법 제정과 동시에 개정 운동이 시작됐다. 1989년 3월 임시국회에서 개정안이 통과된 이후 여러 차례 개정을 거듭하며 적용 대상, 차별 개념 등이 확장됐고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양립지원에 관한 법률’(2007년)로 개정됐다.

여성노동자, 차별철폐 방안 단체협약에 담아

1987년 당시만 해도 여성노동자가 결혼하면 사표를 내는 게 관행으로 여겨졌다. ‘결혼 퇴직’은 은행이나 보험회사, 병원처럼 여성노동자가 다수인 곳에서도 벌어지던 일이었다. 남녀고용평등법은 혼인⸱임신⸱출산을 퇴직 사유로 예정하는 근로계약을 체결할 수 없도록 했지만, 현장에서는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병원, 공장, 학교, 은행 등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했다. 이들은 노동조합을 뒷배로 남녀고용평등법 적용을 주장했고, 누가 그만두라 하지 않더라도 눈총 때문에 그만둬야 하는 상황을 헤쳐나갔다. 범한화재해상보험(KB손해보험)에서 한 노동자는 산전산휴 휴가를 쓰며 ‘버티기’를 했고, 임산부 작업복을 회사로부터 제공받기도 했다. 동산의료원 여성 간부는 결혼을 앞두고 벌어진 부당한 인사이동에 항의하여 투쟁했다. 울산대병원에서는 “여성 직원의 근무는 결혼 후 1년까지로 한다”는 성차별 정년을 없애는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대한상의노조에서도 여성노동자의 산전산후 출산휴가를 보장하는 단체협약을 맺었다.

여성노동자들은 전노협 건설과 활동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전노협은 “직종, 남녀, 학력 간 차별 임금을 철폐하고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쟁취한다, 여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의 철폐와 모성보호를 위해 투쟁한다”는 강령을 채택했다.
남녀 임금 차별철폐는 1990년 이후 민주노조 진영의 요구로 안착했다. 단체협약으로 여성의 정년을 늘려나갔고 호봉제도 개선했다. 모성보호권 확보를 위해 모성보호 주간을 선포하고 투쟁했으며 기혼 여성노동자의 일할 권리를 위해 탁아입법 제정 투쟁을 전개했다. 서울대병원 등 여러 사업장에서 단체협약에 탁아시설 설치를 명기했고, 마산에선 공단 내에 공동탁아소 설치를 요구했다. 이러한 여성노동자의 요구가 3·8 여성대회 실천 과제로 제기되기도 했다.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없는 곳에 노조를 만들었고 여성부를 두었다. 여성노동자의 요구가 무엇인지 조사해 정식화하고 교섭과 투쟁에 나섰다. 고충처리기관을 통한 개별적 권리 요구를 넘어 노동자들은 ‘단체협약 체결’을 전체 여성노동자의 차별을 없앨 방안으로 선택한 것이다.
또한 여성 자신뿐 아니라 남성노동자의 인식 변화를 꾀했다. 전국각지에 만들어진 여성단체와 손잡고 구체적 권리 쟁취 투쟁을 벌이며 경제적 평등 인식을 전파했다. 남녀 고용평등에 관한 법은 현장에서 투쟁의 최저 기준이 되고 투쟁을 통해 제기된 요구는 또 법개정 투쟁의 근거가 되었다.

불안정노동 심화로 한국 남녀 임금 격차 여전히 29%

1988년 4월 1일부터 남녀고용평등법이 시행됐지만, 한국 여성의 경제적 평등은 현재의 과제임을 말해주는 지표가 있다. 2025년 영국 시사주간지 가 3월 8일 여성의 날을 앞두고 ‘유리천장 지수’를 발표했는데, 한국이 OECD 회원국 29개 중 28위를 했다. 여성의 노동 참여율, 소득, 유급 육아휴직 현황 등 10개 지표를 반영한 결과란다. 특히 여성 노동 참여율 조사 결과는 남성보다 15%포인트 낮게 나타났다. OECD 평균 성별 임금 격차는 11%까지 줄어들었는데 한국은 29%였다.
지수가 수년간 최하위에 머문 이유는 여성노동자의 고용 불안정성과 낮은 최저임금이 큰 이유다. 실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2023년 여성 임금노동자 중 비정규직 규모가 45.5%라고 발표했다. 이는 남성의 1.5배에 달하는 규모다. 정년퇴직하는 여성노동자는 5% 미만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불안정노동에 대한 사회적 대안이 마련되지 않는 한 성별에 따른 경제적 평등 실현은 요원하다. 남녀 경제적 평등은 생존의 문제고 여성노동자의 요구이자 모든 노동자의 요구다.

[텔레그램] https://t.me/+JRyXRFcgs8MxOTE1
[홈페이지] https://www.hannae.org/bbs/board.php?bo_table=newsletter&wr_id=152
[사진] 20호(1990년 3월 9일) 2면 기사.

Address

설문동 327-4
Goyang
10254

Opening Hours

Monday 10:00 - 18:00
Tuesday 10:00 - 18:00
Wednesday 10:00 - 18:00
Thursday 10:00 - 18:00
Friday 10:00 - 18:00

Telephone

+82319769744

Alerts

Be the first to know and let us send you an email when 노동자역사 한내 posts news and promotions.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used for any other purpose, and you can unsubscribe at any time.

Contact The Museum

Send a message to 노동자역사 한내: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