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3/2024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에서 간행한 “다시 찾은 보물” 시리즈 6권의 책을 어제(3월 9일) 받았다. 먼저 좋은 기획으로 간행한 책을 보내주신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문화도시센터에 감사드립니다.
시리즈 2권 『청주의 역사인물』 에서는 11명의 역사 인물을 소개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배창근을 소개하고 있다.
조혁연은 2021년 12월 충북학연구소의 에 「기독교인 배창근의 의병 활동과 순국」을 게재하면서 꾸준히 배창근에 관심을 가지고, 2023년 12월 27일 중부매일에 “청주의 역사인물 13, 배창근, 해산군인에서 ‘기독인 의병’이 되다.”를 게재하고, 2023년 3월 2일에는 불교방송 “라디오 충북역사 기행”에서도 배창근을 소개하고 있다.
『청주의 역사인물』 에서 배창근을 소개하는 이도 조혁연으로, 배창근을 청주 사회에 지속하여 소개하는 열의에 감사를 전한다.
조혁연의 배창근에 대한 글은 「기독교인 배창근의 의병 활동과 순국」이 중심에 있으며, 『청주의 역사인물』 속의 배창근 기사는 중부매일 기사와 유사하며 새로운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의 글에서 몇 가지 보완해야 할 점을, 『청주의 역사인물』과 「기독교인 배창근의 의병 활동과 순국」을 통해 검토해 보려 한다.
조혁연은 「기독교인 배창근의 의병 활동과 순국」 133페이지에서 “충북 기독교 역사를 집대성한 『충북기독교백년사』(2002, 충북 기독교선교100주년 기념사업회)도 그의 아들 배민수 목사를 언급하면서 ‘1896년 청주에서 청주 의병대장 배창근의 외아들로 태어나’라고 한 단어만 기술하였다. 게다가 『충북기독교백년사』는 배창근이라는 인물을 찾아보기 [색인표]에 싣지도 않았다. 전국은 물론 충북 기독교계도 최소한 지금까지 배창근이라는 인물을 거의 모르고 있거나 주목하지 않은 셈이다.”라고 하였다. (밑줄은 필자가 강조하기 위해서)
이에 대한 답으로, 먼저 배창근에 대해 알아보고 배창근이 청주에 소개되는 시기와 내용을 정리하려한다.
배창근은 청주진위대 부교(하사)로 근무하던 1907년을 전후한 시기에 청주읍교회에 입교하였으며, 1907년 8월 4일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당하자 이후, 8월 26일(음력 7월 18일) 진천군 초평면 사방기에서 의병을 토벌하다 낙오한 일군 2명을 총살한 죄목으로 1908년 여름 체포되어 동년 11월 공주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고, 1909년 6월 대심원에서 원심이 확정되어 동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아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충북의 의병투쟁사와 독립투쟁사에서는 배창근을 중요하게 기록하지 않고 있고, 또한 청주제일교회에서도 배창근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배창근의 외아들 배민수 목사는 청주에서 태어나 배창근을 따라 청주읍교회 교인이 되었고, 청남학교(지금의 청남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학교에 진학하며 청주를 떠났다. 배민수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후 청주제일교회를 방문하여 환영받았고, 1965년 2월 11일, 배창근의 의병 활동 당시 배창근의 동지였던 한봉수를 만나 배창근의 의병투쟁에 관해 한봉수가 기록한 3페이지의 “의사 배창근 씨 순국투쟁기(義士 裵昌根 氏 殉國鬪爭記)”를 전달받는다.
배창근에 대한 처음 기록은 1998년 이쾌재 목사가 충북노회 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발간한 『충북노회사료집』에 수록된 케긴 선교사의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배씨의 남편은 반란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다. 그가 아들을 서울에 있는 감옥으로 오라고 전갈을 했으나 그녀는 돈이 없다. 선교사들이 도울 수 없을까?” (P.108)
90~110페이지에는 “한국선교전선(The Korea Mission Field) 제5권 1909년 8월 15일 한국 서울”을 제목으로 여러 글을 번역해서 싣고 있고, 케긴 선교사의 글도 그중 하나이다.
는 1905년 11월에 창간되어 1941년 11월에 폐간되기까지 국내에서 선교사들이 발행한 영문 월간잡지로, 한국 교회 역사를 비롯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전반에 관한 문헌으로 한국 근세사 연구의 필수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1986년에 영인하여 보급되었다.
1909년 8월호에는 청주선교부가 정식 개설을 허가받은 일을 축하하기 위해, ‘청주 특집호’로 제작하여 기사 전부가 청주선교부 내용으로 채워졌고, 『충북노회사료집』 90~110페이지에 번역문이 실려있다.
두 번째로 알려진 기록은,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배민수 자서전』으로 1999년 출판하였으나, 청주에는 2003년 10월 13일, 번역자 박노원 목사가 충북기독교역사연구회에 『배민수 자서전』을 소개하고 증정하며 배창근이 청주에 알려지게 되었다.
세 번째 기록은 배창근의 판결문으로 1974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에 수록되었으나, 2003년 『배민수 자서전』이 청주에 알려진 뒤로 판결문 역시 알려졌다. 충북기독교역사연구회보 제28호(2006.12.28)에는 ‘배창근 판결문’과 ‘공적 조서’ 그리고 배창근에 관한 몇몇 기사가 실려있다.
네 번째 기록으로 2012년 국학자료원에서 출간한 충북대학교 박걸순의 『충북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에는 배창근을 소략하게 기록한다.
“청주진위대 해산 직후 진위대원들의 구체적인 활동으로는 1907년 8월 중순 경 하사 출신인 배창근(裵昌根)과 병졸 출신의 이기석(李基石)이 진천군 초평면에서 의병 탄압을 위해 출동한 일병 2명을 유인하여 사살한 일제 측 기록이 확인된다.”
박걸순의 기록은 학계에서는 처음으로 배창근에 관해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기록이 배창근이 청주에 소개된 과정과 내용이다.
조혁연은 『충북기독교백년사』에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전국은 물론 충북 기독교계도 최소한 지금까지 배창근이라는 인물을 거의 모르고 있거나 주목하지 않은 셈”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논리의 비약으로 『충북기독교백년사』는 단지 저자 전순동 개인의 주장일 뿐이며, 결코 충북 기독교 역사를 집대성하지도 않았다.
배창근의 아들 배민수 목사는 1930년대 이후 개신교 내에서 상당히 저명한 인물로, 1910년대 평양 숭실학교를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국민회 조선지회’에서 북한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 김형직과 민족운동을 함께하였고, 기독교농민운동가로 그의 농촌운동과 기독교사상은 이미 여러 저서와 논문의 주제가 되어 출판되었으며, 이들 저서와 논문에서는 예외 없이 배창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조혁연은 『청주의 역사인물』 155페이지에서 “배창근의 아들 배민수(裵敏洙, 1897~1968)는 1993년 자서전 『Who Sha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누가 그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을 미국에서 영문으로 썼다. 그는 유학생 출신의 목사였다. 이 자서전은 1999년 『배민수 자서전』이라는 이름으로 연세대학교에서 번역·출간됐다.”로 기록하고 있는데, ‘1993년’이 묘한 위치에 삽입되어 오해를 일으키고 있다.
배민수가 『Who Sha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을 탈고한 시기는 1951년이나 출판하지 않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농어촌부 총무로 근무하던 『배민수 자서전』의 번역자 박노원 목사가, 배민수의 아들 배영 박사와 협의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농어촌부에서 영인 출간한 시기가 1993년이다.
영인본 또한 정식으로 출판하지 않았고 당시 ‘마스터 인쇄’로 불린 형식으로 적은 수량만 인쇄하였다.
6년 후 박노원은 이를 번역하여 『배민수 자서전』을 출간한다. 영인하여 출간한 『Who Sha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과 『배민수 자서전』은 몇몇 차이가 있는데, 가장 큰 차이는 영인본에 실린 사진과 번역본에 실린 사진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그리고 배민수의 생년월일은 1896년 10월 8일이다.
자서전의 영문 제목 “Who Sha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은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발췌한 것으로 본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태복음 7:21, 표준새번역)
조혁연은 『청주의 역사인물』 158페이지에서 “염곽상(鹽藿商)이라는 새로운 직업을 갖은 배창근은”이라고 기록하며, 각주에서 “염곽상(鹽藿商): 마른 미역을 파는 장사치”로 소개하고 있다. 염곽상에 대해 방기중은 ‘마른 미역을 파는 장사치’보다는 포괄적인 ‘등짐장수’로 서술하는데, 이편이 좀 더 적절해 보인다. (방기중, 『배민수의 농촌운동과 기독교사상』,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9, P.32)
또한 162페이지에서는 “배창근의 사형 집행은 『순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실릴 정도로 당시 정부도 주목했다.”로 기록하는데,
배창근의 행적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으나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순종실록』과 『승정원일기』는 배창근의 교수형 집행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기록할 뿐이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선별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조혁연은 주요 참고문헌으로 “『배민수 자서전』(1999, 연세대학교 출판부), 청주군 청주면 본정삼정목(本町三丁目)의 『토지조사부』(1912), (1912), 『독립운동관련판결문자료집』(2011),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1974)” 등으로 기록하는데, 배창근과 직접 관련이 적은 “청주군 청주면 본정삼정목(本町三丁目)의 『토지조사부』(1912)”를 제외하고는 이미 모두 잘 알려진 문헌들이며, 『배민수 자서전』을 제외한 대부분 문헌은 인터넷 검색이 가능하다.
조혁연의 배창근에 관한 서술이 전적으로 『배민수 자서전』에 의존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 지금까지 알려진 배창근에 관한 기록은 아들 배민수의 『배민수 자서전』 기록이 유일하다.
이는 배창근의 의병활동이 객관적인 평가를 받기에는 사료가 부족함을 의미하며, 청주에서 배창근이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여러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자서전이 가지는 한계인 ‘미화된 기억’과 ‘기억의 오류’는 『배민수 자서전』 여러 곳에서 상당히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인 배창근의 의병 활동과 순국」 139페이지에서 『배민수 자서전』의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기독교 안에서 자신의 영혼뿐 아니라 조국까지도 구원할 길을 찾으셨다. 그는 선교사들과 협력하면 일본을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위 인용문에 대해 조혁연은
“배창근이 왜 기독교를 믿게 됐고, 그 안에서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앞 문장의 2개 목적어 중 하나는 ‘조국까지 구원’이고, 뒷문장의 희망 섞인 목적어는 ‘일본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배창근은 이미 내면에 자리 잡은 이 같은 의식화된 신념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사려 된다.”라고 서술한다.
한국의 기독교 역사학계에서는 이미 초기 기독교 신자들의 입신 경위에 관해서는 이덕주 등의 연구로 많이 알려졌고, 청주읍교회의 초대 신자 중에는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일본을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청주읍교회에 입교한 초대 교인은 배창근 외에도 방흥근과 함께 광남학교를 설립한 김태희가 대표적이다.
청주읍교회를 설립하고 청주선교부를 개설한 밀러의 『조선에서의 복음』(충북기독교역사연구회 번역, 1999)과 이달 중 출간할 밀러의 『조선인 친구들』(충북기독교역사연구회 번역, 2024년 3월중 출간예정)에는 밀러가 기록한 청주, 충북의 여러 기독교 입신 사례를 보여준다.
인용문에서 배민수가 전하는 아버지의 생각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항일운동에 나선 배민수의 삶을 투영하였다고 생각한다.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일본을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기독교에 입신했던 많은 사람의 바람과는 다르게, 선교사들은 바로 이 시기에 ‘평양대부흥운동’을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신자들이 의병투쟁(선교사들은 ‘소요 사태’ 또는 ‘반란군’이라고 표현한다)에 가담하는 일을 막았고, 이에 격분한 많은 이들이 전국에서 교회를 떠나기도 하였다.
조혁연의 글 속에서 배창근에 대해 함께 나누고 싶은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이를 통해 배창근에 대해 함께 알아가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청주 사회에 배창근을 소개하는 일에 앞장서서 노력 해주신 조혁연 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한다.